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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23) -- 배심원(Juror)


BY ps 2002-11-30


어느날 집으로 공문편지가 날아와 열어보니, 미국국민(U.S. citizen)의
의무중 하나인 배심원으로 나오라는 거였다. 기간은 2주 동안이고.

회사에 알아보니 2주까지는 유급휴가로 처리가 된다하여 (안 그런 회사도 있음)
미국의 사법제도를 직접 겪어볼 요량으로 참석을 하기로 했다.
(면제 받기위해선, 담당 판사에게 사정설명을 편지로 보내 면제허가를
받기도 하지만, 지병이나 설명될 수 있는 재정적인 중대사안이 아니면
허가가 안 나옴)

정해진 날 아침에 법원으로 가 지정된 방으로 들어가니, 약 10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남녀 노소, 각양 각색의 인종, 옷차림등...
과연, 미국을, 그 중에도 이민자들이 많은 캘리포니아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왔구나라며 감탄하고 있는데, 법정 서기관인듯 한 미국여자가
들어와 우리들의 임무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매일 9시까지 와서 3시 반까지 기다리게 되는데...
중간중간에 호명되어 법정으로 불려 들어가, 사건담당 배심원으로 뽑히면 뽑히는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2주 동안 서로 얼굴을 보게 될거라 했다.
법정에 불려 가는 시간 보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므로
책등 읽을거리를 가져오는 게 도움이 될거라는 충고도 하고,
아울러 교통비조로 하루에 5불(dollar)씩 받게 될거라 했다.
(최저임금이 시간 당 3불 25전 할 때임)
보통 사건은 2,3일 걸리고, 가끔 신문에 크게 나는 대형사건은 몇주씩
걸리기도 하지만, 극히 드물거라는 얘기도 했다.
은근히 걱정이 됐다.
회사에선 2주가 넘게되면 봉급이 안 나온다고 했는데, 그런 사건이 걸리면 어쩌나?

대기실에서 지루한 이틀을 보내고, 사흘째에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려지고,
나는 난생 처음 영화에서나 보던 미국법정을 직접 보게된다는 가벼운 흥분감을 안고,
30명 가량의 '대기 배심원'들과 법정으로 향했다.

잠깐 앉아 기다리니, 판사님이 들어오고,
간단한 사건 설명 후에 배심원 선정 절차가 시작됐다.
우선 서기관이 무작위로 추출한 12명이 배심원 석에 앉으면,
피고측 원고측 변호사나 검사가 자기 쪽에 불리할 것 같은 사람들은
(인종이나 직업, 또는 사고방식등)
배심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때로는 질문도 하고, 때로는 아무 설명도 없이...
빠진 사람들은 다른 대기자들로 충원되고...

사회를 대표한다는, 무작위로 뽑혀 온 사람들 중에서 선정되는 배심원들이
공정한 심판을 하리라고 믿고 있던 나는, '공정' 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
유능한 (혹은 값 비싼) 변호사나 검사의 능력에 따라 판결이 얼마던지
인위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배심원 과반수 이상의 의견으로 판결이 나는 민사사건과는 달리,
형사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나기 위해선, 12명 만장일치의 유죄의견이
나와야 하는데, 피고측 변호사가 제대로(?) 뽑은 배심원이 억지로라도 무죄라고 주장하면
무죄판결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몇년 전, 부인을 죽인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에 섰던,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오제이 심슨(O.J. Simpson)이다.
민사 소송에서는 부인을 죽였기때문에 그 남은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오고, 형사 소송에서는 한 두명의 배심원이
확실한 (beyond the reasonable doubt) 살인 증거가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무죄로 판결이 났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살인자라고 믿고 있었으나,
많은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써서, 몇명의 배심원들에게 '혹시 아닐 수도...'라는
생각이 들게끔 유도한 결과였다. 그는 지금도 자유인으로 잘 살고있다.

2주 동안 딱 한번 배심원 의자에 앉았다가, 피고측 변호사에 의해 퇴짜(?)를 맞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마지막 날 법원을 나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불려 나온 많은 사람들의 시간낭비(경제적 손실)...
결코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배심원 퇴짜 제도...
그리고,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형사 사건의 유죄 만장일치 제도.....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의 사법제도도 여기저기 맹점이 느껴졌는데,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만든 법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가끔 혼란해지는 의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