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는 것들 - 아버지와 딸>
어젯밤 아버지 꿈을 꾸었다.
참으로 기다렸던 꿈이었는데 내용은 내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꿈을 맘대로 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못내 아쉬웠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결국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아버지와 한 마디 말도 나눠 보지 못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통곡을 하며 애통해 하셨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계시는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꿈이었다.
이십대에 나는 종종 아버지 꿈을 꿨다.
꿈에 나타나신 아버지는 아이보리의 마고자를 말끔하게 입으시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결코 해 본 적 없는 애교를 다 떨며 아버지와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잠에서 깨어 나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을 정도 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나는 아버지께 말을 걸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무뚝뚝하고 완고하신 표정에 짓눌려 대답도 제대로 못했으니
어디 한 번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세 살 때부터 아버지 발이 닿을 까봐 다른 방에서 언니들하고
잠을 잤다고 하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좀 자라서도, 아버지가 안방에 계시면 건넌방으로 건넌방에
계시면 안방으로 숨바꼭질 하듯 피해 다녔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던 아버지인지라 나는 ‘아버지’라고
불러 본 기억조차 없다.
그런 아버지가 중 2때 갑자기 먼 길을 떠나셨다.
나와 둘이서, 볍씨를 뿌린 논에 비닐을 씌우고 돌아와 한재를
재탕하여 드셨는데 그게 잘못 되어서 갑자기 떠나셨던 것이다.
철이 없고 아버지한테 워낙 정이 없던 터라 슬프다는 생각조차
안 했지.
그런데 지나간 일은 모두가 그렇게 그리운 것일까?
점차 성인이 되면서 나는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자주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우린 다정한
부녀가 되어 있었다.
못 받은 아버지 정을 꿈에서나마 듬뿍 받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 결혼한 이후에는 그런 기분 좋은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아이들이 태어나 어느 정도 자란 지금, 아이들은 남편이
들어오면 함성부터 지르고 가만 놔 두질 않는다.
어찌 보면 버릇이 없어 보일 정도로 남편과 장난을 치고
끊임없이 조잘댄다. 내 어렸을 적에는 결코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내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부녀지간에 격이 없이 지내는 그런 모습들은 바로, 나를
사로잡는 모습들이다.
아이들과 뒤섞여 노는 남편의 모습은 전부터 내가 그려왔던 모습이며
내가 해 보지 못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다소나마 보상되는
순간들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남편의 조용한 미소와 아이들하고 노는
모습들은 이십대에 꾸었던 그 꿈과 너무도 흡사하다.
날 빙그레 웃으시며 바라보는 아버지는 바로 남편의 모습과도
같으며 마냥 애교를 떨며 정담을 나누는 나의 모습은 아이들이 지들
아빠한테 하는 모습하고 많이 비슷하다.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 있으니 아버지 생각이 또 다시 밀려든다.
“아버지 오늘 밤에 한 번 더 나타나 주지 않으실래요? 예전에 꾸었
던 그 때처럼 말이 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