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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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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서


BY 초롱이 2001-06-30

아침에 백화점 셔틀버스에 올랐다. 이제 이것도 내일이면
더이상 운행이 되지 않는다니, 소비자의 편리함보다는 상인들의
이권때문에 소비자들이 또 뜨거운 뙤약볕을 참고 거리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에어컨 장치가 잘 되어 있는 버스안은 너무나 시원하고 쾌적했다.
다행히 도착지에서 먼 곳이 아니라 좌석은 반쯤 정도만 차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창 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이제 채 열장도 남지 않은 책을 꺼내 들었다.
차 안에서 책을 읽어보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올해 첫째를 초등학교를 보낸 나에게도 이런 호사스런 시간이
주어지는 걸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차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숙력된 곡예사처럼 도로위를 부드럽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필시 이 버스의 운전자는 경력이 풍부하리라.
어느새 내 눈은 몇 장 남지않은 책에 고정되기 시작했다.

시선 반쯤 아래로 파릇파릇한 거리의 수목들이 자신을 봐달라고
유혹하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 두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하지만 내 몸이 아직 이러한 흔들림에 익숙치 못한 탓일까.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글자들은 자꾸만 흐릿하게 달아나
버렸다. 결국 물흐르듯 읽어 나가던 책을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서너장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몇 장이 더 남아 있었다. 고작 서너장에 불과하건만 나
는 결국 책을 덮어 버렸다. 백화점에 도착할때까지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활자만 읽어내려가면 무엇한단 말인
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니 읽은것만 못한 것을.

책을 덮자 갑자기 푸른 하늘과 힘찬 보폭의 사람들과 터질듯한 생
명력 가득한 가로수들이 내 앞에 와서 우뚝 섰다. 그들은 모두 살
아 강렬하게 숨쉬고 있었다. 비로소 내 입가에서 맑은 숨이 토해
져 나왔다.

그래, 물은 흘러야 빛을 발하고 달리는 버스에선 가볍게 손흔들며
스쳐가는 가로수들과 눈인사라도 나누어야 세상의 밝음을 볼 수
있는 것이리라. 잠시 자연스러움에 역행하는 과욕으로 인해 책속
의 내용도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세상의 눈부심도 놓칠뻔 했다.

정신없이 세상과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셔틀버스는 목적지에 닿
았다. 책 한권이 든 가방은 제법 존재감을 인식시키며 내 등에 찰
싹 달라 붙는다. 나는 그 책의 존재감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였다.

가볍게 가방끈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본다.
아침의 풍경들이 일제히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