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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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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것들


BY 슬픈미소 2002-10-27


어디선가 장마에 부러진 나무들을 태우는 건지 그리운 정취가 느껴지리 만큼 고소하고 향긋한 내음과 함께 유리창 너머에 하얀 연기들이 가득찼다.

누가 태우는 것일까? 불현듯 피천득님의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이 생각난다. 낙엽이 타는 내음을 커피향에 비유한 그 글이 지금 내 가슴속에 그리움 처럼 피어 오르고 있다.

내가 자란 시골집. 이른 아침이면 안개인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인지 구분하기 힘들정도로 하얀연기들이 온마을을 휘어감고 도는 아침풍경, 아침눈을 뜨면 타닥 타닥 거리는 소리에 부엌으로 들어가면, 아궁이에 나무를 가득 넣어 놓고 어머니는 금새 밭에 나가 아침상에 올릴 깻잎이며, 부추, 그리고 여러가지 채소들을 바구니 가득 담아 오셔서는 아궁이에 나무 가득 넣어 두고 다듬고, 다시 불소시게로 한번 휘이 저어 주고, 다시 이것저것 조물거리셔서 아침은 나물가지로 상위가 좁을 정도였다. 비록 생선 한토막 없고, 돼지고기 한점 없는 아침상이지만, 맛있게 먹어 치우고 한쪽칸막이에 김치가 가득든 도시락을 책가방속에 넣고, 친구들과 나서는 아침공기는 이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향긋한 내음이었다. 봄이 되면 야릇한 새싹
내음이 살짝 묻어 있었고, 여름을 알리는 길목은 푸릇한 산내음이 묻어 있으며, 가을에는 낙엽의 냄새가 어울어 지고,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는 쓸쓸한 하지만 푸근한 내음이 묻어 나오는 그런 아침공기들......

김치 몇조각 든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가면 책가방 밑은 언제나 김치국 물로 벌건 했다. 책에서는 김치국물과 종이 냄새가 어우러져 퀘퀘했고, 휴지도 귀했던 시절이라 다 써버린 노트장 찢어서 대강 김치국물을 닦아 내고 챙피한 마음으로 짝꿍이나 다른 친구들의 책을 보면, 10중에 8명은 책들이 얼룩달룩 거렸다. 김치국물로 인해서.....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해질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마땅히 할일도 없었으면서 언제나 해를 넘겨야 집으로 돌아왔고, 2키로가 넘는 길을 아장거리며, 헛짓 다 해가며 터벅 터벅 걸어 동네 어귀에 다다를 때 쯤이면 곳곳에서 저녁 지어 먹느라 굴뚝에는 연기가 한폭의 그림처럼 저녁노을과 어울어져 피어 오르고, 어머니는 몇번이고 마을앞에 나왔다 들어가셨다 노심초사 하시며 나를 기다리셨다. 저녁상을 차려놓고, 여름에는 모기불 마당에 지펴놓고 대가족이 모여 앉아 받는 저녁상에는 우물속에 넣어 두었다가 건져 올린 김치가 시큼하게 익어 물반 김치반으로 올라와 있었고, 저녁은 언제나 고추에 된장이 거의 다 였지만, 저녁을 먹고 나면 아궁이에 넣어 두었던 감자가 올라오고 찐 옥수수와 유월에 심어서 7월에 먹는다는 유
월콩 삶은것이 후식으로 나왔다.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모기를 쫓기위해 기다랗게 올라온 쑥대와 갖가지 풀들을 불 위에 올려 놓고 연기를 피워대는 모기불을 마당에 지피고 누워서 보는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었고, 그 별들의 전설을 부모님이 돌아가면서 해주시면 난 어느새 잠이들고 말았었다. 가끔 저녁을 먹고 치운후 늦은 저녁이 되면 엄마를 따라 개울로 목욕을 가보기도 하지만, 내놓고 목욕할수 없는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속에서 누군가 둑에 서성이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숨죽이며 서성대는 사람이 가기를 기다리고, 그렇게 도둑처럼 조용히 목욕을 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시고, 엄마를 따라 나왔던 친구들과 달과별이 어우러진 둑에 앉아 달빛을 벗삼아 자그만 돌맹이 몇개 주어 공기놀이 (사투리로 콩따먹기)를 하다보면 밤이 늦어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우린 손에 손을 잡고 늦은
밤에도 무엇이 즐거운지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함께 부르며 동네로 들어가 곤 했었다.

그립다.
이른 아침 계절마다 바뀌는 아침의 향기도 그립고, 집뒤에 이제 죽어버린 그 우물물의 맛도 그립고, 해질녘에 굴뚝에서 피어올라 노을과 함께 빨간빛이 되어 버리는 저녁하늘의 연기도 그립다.
이제는 풍요속에 모두 사라져 버린것들이 그립다. 아무리 냉장고가 좋다 하지만, 그 옛날 우물속에서 건져 올려 시원한맛을 만끽할수 있었던 그 김치맛도 이젠 영영 찾아 보기 힘들고, 오염이 되어 고기들도 별로 살지 않는 물가에서 남몰래 목욕하는 사람도 없으니, 서성대는 남정내들 때문에 숨죽일 필요도 없지만, 그 모습이 그립다.
늦은 여름밤의 모기불과 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리운 초가을날,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모기때문에 모기향을 피우고, 스프레이형식으로 된 모기약도 뿌리고 나니 문득, 모기불을 지펴놓고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니 모습도 그리워 진다. 젊은 시절을 농사일에 허리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나이드셔서도 그일을 계속하고 있는 내 어머니의 그 젊은 모습도 그리워 해 보건만,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것들이기에....

오늘밤 그 옛날 별이겠지만, 어쩌다 하나씩 보이는 별을 보며 잊혀진 모든것들을 그리워 해 본다.

그렇게 지겹던 김치 몇조각 든 도시락과 책에 얼룩진 김치국물 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