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웃고 싶어서 좀 오래 전에 써 놓았던 글 하나 올립니다.
얼마 전 TV 에서 '앗 나의 실수' 라는 프로가 방영된 일이 있다.
그 내용을 보니 군대에서 있었던 일로서, 상관이 야참으로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으나 끓일만한 그릇이 없어서 고심하던 끝에 소대장집 이사할때 창고에 있던 요강이 생각나서 그것을 몰래 가져다가 매일 밤 야참으로 라면을 끓여주다가 상관에게 들켜 혼나는 장면이었다.
얼마나 우스운지 저녁상을 물리고 설겆이를 하면서도 계속 웃었더니 큰 딸이 "엄마, 그렇게도 재미있어요?" "그게 아니라, 엄마도 전과가 있거든"
초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 쯤인것 같다
너무도 산골 마을에서 자란 탓에 오후 3시경에 지나가는 엿 장수가 유일한 낙이었다. 조그만 구멍 가게가 하나 있었으나 돈을 주고 뭘 사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교회 전도사님이 오시면 사이다 한병을 사서 대접을 하였으나 사이다는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심부름을 내가 해서 공병이라도 내 차지가 되면 행운이다.
대 농가에 4대가 함께 살았으므로 머슴들까지 식구는 열 일곱이나 되엇다. 그 중에서 두살 위인 오빠는 항상 내 친구였고 동조자였다. 그 날도 엿 장수의 가위질 소리 들릴때가 되어오자 오빠랑 나는 헌 고무신짝을 열심히 맞추어 본다. 매일 하는 일이라 아무리 식구가 많아도 금방 신발이 떨어질리 없고, 짝 맞지 않는 신이 있을리 없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람,사랑채의 할아버지 방문앞에 흰 고무신 한짝이 있었다.
그 당시는 모두 검정 고무신을 신었는데 외출 할때만 흰 고무신을 신었었고, 남자 흰 고무신은 유난히 엿을 많이 주었다. 오빠와 나는 보고 또 보았지만 분명히 짝이 없는 신발이었다. 흰 고무신, 그것도 남자 고무신,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씨익 한번 웃고는 누가 먼저라 할 사이도 없이 그것을 들고 신작로를 향해 내리 달렸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아직도 입가에 단 기운을 느끼며 집으로 들어서는데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막대기로 위협을 하고 계신다. '아뿔사! 뭔가 잘못 되었구나' 하는 순간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다.
"너희들이지?" 할아버지의 부릅뜬 눈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 한쪽 다리가 없으신 외발 할아버지가 놀러 오신 모양이다. 난처한 할아버지는 당신보다 발이 작은 친구분께 선반위의 흰 고무신 한 짝을 내려 지푸라기로 묶어서 신겨드리며 배웅을 하신 후 눈을 한번 힐끔 하시고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 후 몇달이 지나도록 외발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오시지 않으셧다. 그런데 오후만 되면 선반위에 남아있는 신발 한짝이 왜그렇게도 눈에 들어오는지...
그러던 어느날 친척집에 결혼식이 있어 평소에 항상 집에 계시던 할아버지까지 외출을 하셨다. 참다못한 오빠와 나는 막대기로 선반 위의 신발을 끄집어 내렸다. 물론 엿을 사먹기 위해...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을 즈음에 느닷없이 외발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목발에는 그전에 신고 가신 할아버지의 신발 한짝을 대롱대롱 매달은체...
우리는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실때 까지 꼼짝없이 사랑채 뒷 마루에 앉아있었다. 얼마 후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와 함께 잘 가시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부르시는 할아버지의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다. 친구분이 가지고 오신 신발을 선반위에 올려놓으시다가 있어야 할 한짝의 신발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본 할아버지는" 이것도 가서 엿 사먹어라" 하시며 남아있던 신발 한짝으로 볼기짝이 발갛도록 때리셨다. 그것마져 엿 장수에게로 갔지만...
혼은 많이 낫지만 지금도 겨울철 시내 한 귀퉁이에서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나거나. 민속음식점에 나란히 놓여진 흰 고무신을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나서 나 혼자 몰래 웃음짓곤 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준 내 고향 창원, 이제는 계획도시로 탈바꿈되어 영원한 가슴속의 추억으로만 남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나의 아이들은 그 후대에게 무슨 추억을 들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