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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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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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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86


BY 녹차향기 2001-06-14

문주란이란 꽃 아세요?
꽃?
아니 난(蘭) 말이예요.
지금 저희집 베란다에 있는 문주란에 꽃이 피어 그 그윽한 향기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답니다.
어쩌면 저 향기는 천국에서나 맡을 수 있는 내음이라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네요.
어느날 꽃대가 하나 쑤욱 올라오더니 자고 일어나 보면 한뼘씩이나 자라나 있고, 그 몇일 후엔 흐드러지게 꽃이 피고지고 있답니다.
가수 문주란이 왜 그 이름을 택했는지 알만하였어요.

며칠전에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에 초상이 있어서 밤늦게까지 병원에서 함께 일을 하고 돌아왔어요.
살아생전 자식들을 위해 한 순간도 편안하게 지내신 적이 없었던 일흔살이 좀 넘으신 그 아버님께 급작스런 신체의 이상이 나타났다고 해요.
자식들이 행여 알세라 당신 혼자 병원엘 다니시곤 하셨는데, 급기야는 서울의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미 암은 폐 전체에 퍼지고 말았다고 해요...

그것이 지난 2월의 일이었고, 불과 4개월을 못 넘기시고 운명의 끈을 놓고 말으셨다는데, 7남매를 낳아 6남매를 시집 장가 다 보내시고,
손주, 외손주 다 안아보시고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초상집 분위기가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답니다.

손님들이 어찌나 많이 오시는지, 국이며 밥을 계속 담아내고, 수박을 자르고 상위에 흰종이를 몇번씩 갈아대면서,
전 시어머님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제겐 딱 한 분이시 시어른,
물불 가리지 않으시는 급하신 성격탓에 수십번 제게 가슴아픈 말씀을 남기셨던 시어머님 또한 어느날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수 있음에,
아직 건강하셔서 병원 신세 지지 않으시고 삶의 현장에서 매일
고된 노동을 아끼지 않고 계심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곤,
지난번 아이들 데리고 여행간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셨던 어머님께
제가 품었던 서운함을 그만 풀기로 했어요.
"니들은 사는 것 같이 산다, 무슨 여행이냐? 갈려고 마음 먹었음 됐지 뭐하러 전화는 하냐?"
고 하시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으시곤 말씀이 없으셨던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지요.

"어머님, 날씨가 많이 더워졌는데, 어머님 방 너무 덥지 않으세요?"
"....."
"에어컨 아직 연결 안 되었죠?"
"....그래..."
"아범더러 에어컨 회사에 A/S 전화 넣으라고 할게요. 너무 건조하지 않게 물수건도 널어두세요. 식사는 하셨고요?"
"먹었다."
"어머님, 또 전화할게요."
"알았다.(힘없이)"
여행다녀와서 잘 다녀왔다고 인사 전화를 드렸을 때도, 아주 냉랭한 음성으로 알았다며 전화를 끊으셨었는데, 매일 전화를 올리니 조금씩 마음이 풀리신 모양이었어요.

저희 시어머님은 여행가는 걸 최대의 사치로 여기시는 분이예요.
골프치는 것 하고요.
그런데, 며느리와 손주가 며칠간 강릉 콘도로 여행을 다녀온다고 하니 마음이 편하셨겠어요?
세대차이일까요?
어머님도 일년에 한두번 고향을 다녀오시는 것 말고는 좀처럼 물좋고 경치좋은 곳으로 떠나시지를 않으신답니다.
각박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이겠지요.

일욜이 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어머님을 찾아뵈었어요.
조금은 냉담하신 듯도 하셨지만 손주들을 보자 반가워하셨지요.
중국집에 전화하셔서 짜장면도 시켜주시고,
또 오후늦게는 햄버거 사오라고 아이들을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보내시기도 하셨지요.
저녁무렵 돌아서 올때는 일부러 나오셔서 손을 흔들며 아이들에게
빠이빠이도 해 주시고요.

한번씩 병원을 다녀올 때면 내게 주어진 건강이 얼마나 고마운지,
한번씩 상갓집에 문상을 다녀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짧고도 의미있는 것인지,
한번씩 결혼식장에 다녀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고 이해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번씩, 한번씩, 한번씩.....

늘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내 가족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렇게 살아가려고요.
어머님,
노여워마세요.
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잖아요?

문주란내음에 잠을 청해야 할까봐요.
그럼 잠자는 동안 천사가 될 줄 혹시 알아요?
이런 신비로운 향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쁘기만
하네요.
처음이라 그렇겠죠?
인터넷으로 향기가 배달되지 않으니, 무척 아쉽기만 합니다.
오늘 밤은 녹차향기 아니고, 문주란향기가 되고 싶어요.

모두 평안한 밤 되세요.
화성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고 하니 어두운 밤 하늘에 붉게 보이는 별도 한번 찾아보세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