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74

결코 겁먹거나 주눅들지 않는...


BY 잔다르크 2002-09-27

[우리집 컴퓨터] 모진 장마를 이겨낸 용마루가 짙은 회색 옷을 입고 가을 햇살을 쬐고 있다. 한 해 풍상에 가닥가닥 골이 진 처마 끝은 금방이라도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릴 것 같다. 너른 안마당에서 마을 장정들이 이응을 엮는다. 할아버지는 제일 어렵다는 용마루와 씨름을 하신다. 여기저기 던져놓은 누런 짚단이 시커멓게 썩은 지붕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높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내지르는 일꾼들의 흥겨운 장단에 늦은 가을이 여문다. 어둑어둑해져서야 엉거주춤 볏짚을 이고 있는 초가를 올려다본다. 동그스럼한 얼굴로 방긋 웃음을 흘린다. 오동통한 자태에 절로 속이 든든해진다. 눈이 내리면 조롱조롱 메 달려 보석처럼 빛날 고드름, 옴폭하니 파여 구슬치기하기에 제 격일 처마 밑 낙수자국, 새들이 집으로 삼기에 알맞을 구멍들, 언제까지나 피붙이처럼 내 곁을 멤 돌 것이라 여긴다. 도회지에서 동생과 자취를 할 때 바람결에 소문이 들려왔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고향마을이 드디어 지붕개량을 한다고... 해마다 올려야 하는 지긋지긋한 일감에서 벗어난다는 기쁨보다 내 유년의 추억을 앗아가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앞섰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갔더니 신라천년의 미소와 같았던 용마루는 온데간데없고 각진 함석 지붕만이 덩그마니 솟아있었다. 소나기라도 한 줄기 내리면 다다닥 요란스레 소리를 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수 년 후 다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 살다가 온 식구가 뿔뿔이 고향을 떠났다. 들리는 소식으론 사랑채는 무너져 내려앉았고 안채만이 주인 없는 서까래를 떠받들고 있다고 한다.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다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 적이 있었다. 결혼 후 우연히 다시 한 번 들리게 되었는데 '아 이렇게 작은 공간이었구나!' 라고 느껴졌지만 그 당시엔 학교 운동장처럼 커 보였던 곳이다. 여태 수 십 번 이삿짐을 꾸리며 남의 집, 작은 집, 큰 집 다 살아 보았지만 일장춘몽 같은 인생사라고 할까? 소리 없이 달아나는 무지개를 쫓는 허상이라고 할까? 영원히 그 집에서 살 것처럼 온갖 치장을 하고 요사스러움을 떨었건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인터넷을 배우며 연습으로 홈이란 걸 만든 적이 있었다. 달랑 글 밖에 올릴 줄 모르는 서투른 실력이었지만 특이한 경험이었다. "다시 내 이름으로 문패를 건 집이 생겼다. 지금은 삭막하고 쓸쓸하지만 못 다한 나의 꿈을 다시 펼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 되었으면, 바람 타고 날아간 옛집 못지 않게 사람냄새로 가득 채울 수만 있다면... 비록 사이버세계지만 지금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공간이다. 이 곳에 터를 잡고 차곡차곡 살림살이를 들여 처녀지에 발을 내딛는 그 떨림으로 또 다른 인생을 살자!"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용마루처럼 소박하고 따스한 미소를 띈 집이 있다. 내 힘에 버거웠던 지나온 날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잊기 위해 온 힘으로 메 달리며 공부하고 만들었던 영상작품... 태그, 애플릿, 포토샵, 스위쉬 그리고 자작 글들. 구석구석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지탱해온 보물이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인기 있는 곳은 아니지만 지친 현대인의 일상 속에 잠시 나른한 휴식으로 다가서는 원두막 같은 곳이고 싶다. 서로 위로하며 어려움을 헤쳐 온 지기들, 따스한 님의 발자취, 그 정에 취해 오늘도 아픈 기억을 허공으로 날리며 날마다 색다른 하루 하루를 살아낸다. "어머니! 학교에서 하는 IT 수업을 받으면 나라에서 주는 컴퓨터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한 번 도전해 볼까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발해서 그 중 성적이 좋은 몇 명한테 준다고 하셨어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처지가 창피하고 부끄러워 선뜻 손들고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둘째... 그렇게 지나가는 말이 현실이 되어 컴퓨터와 한솥밥을 먹은 지 올해로 삼 년째다. 본체 앞엔 '본 컴퓨터는 xx광역시교육청의 재산으로서, 정부 공용물품이므로 임의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란 하얀 딱지가 붙어있고, 정부라는 글씨가 무궁화 꽃 모양 속에 아로새겨져있다. 보통의 컴퓨터처럼 세워 놓는 게 아니고 얌전한 교자상 모양이다. 여러차례 차압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경고와 최후통첩이라는 협박에도 결코 겁먹거나 주눅들지 않는 우리 가족의 울타리요, 안식처다. 어릴 적 나락냄새를 풀풀 풍기던 초가지붕을 올려다보던 그 든든한 느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