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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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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잔치.


BY 雪里 2002-09-08


"점심에 매운탕 먹어요.
알릴만한 사람들, 만나는 대로 알려 놓아요."

"몸도 성치 않으면서..."

"그래도 한번쯤은 같이 먹어야죠"

현관을 나서는 그이는,
늘 불편해 하는 몸으로 또 사람들을 불러
점심을 나눈다는 말에 염려가 앞서는지 시큰둥하니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다.

날도 많이 서늘해 진것 같고
같이 낚시가서 잡은 고기니 한번쯤은 여럿이 모여
먹어야만 내서운을 면할것 같아
나는 아침부터 점심에 여러명이 먹을 매운탕 준비를 한다.

열댓명은 족히 모일테니 밥쌀도 넉넉히 씻고,
쏘가리 매운탕엔 무우는 필수라
냉장고에 있는 무우를 썰고
양파와 풋고추, 마늘, 파, 들깻잎,고추장 듬뿍.
민물 비릿내를 없애려면 된장도 조금 넣어야지.

커다란 비닐 봉투에 온갖 양념을 넣고
내동실에 손질해 넣어둔 쏘가리를 꺼내 들고,
가게로 들어서는데 그이의 눈빛이 곱지 않다.

"오늘 쏘가리 매운탕 먹는다메유?""
"몇시까지 오면 되남유?"

늘 가게에 들락거리는 이들에게 이미 알려 놓고도
나를 염려하는 마음이, 남과 나누는 즐거움 보다
더 크게 자리한 그이의 마음이 보여서
검지를 세워 "한번만 ~!"하며 웃으니 따라 웃는다.

커다란 남비에 가져온 재료를 다 쏟아 넣고
물을 붓고, 쏘가리를 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요란한 냄새에 멈춰서서 넘겨본다.
길가 진열장 앞에서 종이 박스를 찢어 바람막이를 하며
끓여지고 있는 매운탕 냄새는,
어림짐작으로 준비해온 양념인데도
나의 주방장 경력을 무시하지 못하게끔 그럴싸하다.

커다란 코펠에 밥이 끓기 시작 할 때쯤 되니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작은 가게안을 꽉 채우고
아직 멀었냐며 성화를 해댄다.

바빠서 못오는 앞집 중국집 사장님은
짬뽕그릇 달래서 퍼다주고,
매운탕 하나에 밥만 준비된 점심시간이
매워서 흘리고 더워서 흘리는 땀이랑 범벅되어
정신이 없다.

가끔은 엄지를 내밀며 맛있단 말을 대신하면서
좁은 장소에서 펼쳐진 작은 잔치는
코펠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끝이 나고 있다.

"밥을 더 많이 했어야 하는데..."
예상치 않은 인원 추가로 내겐 밥차지가 안왔어도
여럿이 모여 맛있게 먹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르다.

누군가가 배달시킨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며
다 흩어지고 조용한 가게안에서
설겆이 거릴 챙기는 내게 그이가 한마디 한다.

"나도 이런게 좋지만, 자기가 힘드니까....
내가 설겆이 해줄까?"

"됐네요, 말로만~"

이러면서 사는거지 싶다.
몸은 좀 힘들더라도
여럿이 서로 사는냄새 풀풀 풍기며
가끔 이렇게 하면서 살다보면 세월은 가는거고
세월가면 늙을거고...

늙는건 정말 싫은데 머리 밑이 또 희끗거리니
저녁 퇴근길엔 약국에 들러
염색약을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