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길 30여분.
드디어 침대에 누워 나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한 손에는 젖병처럼 생긴 것을 꼭 쥐시고..
아마도 이 젖병이 아버지를 고통속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리라.
병실로 돌아 오신 아버지 시술이 힘드셨던지 그대로
코를 골며 주무신다.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고..
어젯밤 통증으로 한숨도 잠을 못 이루셨다더니 이제야
그 고통에서 벗어나신 것일까.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책을 보다가 나도 그만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었다.
옆 침대에 있는 환자의 기침소리에 잠이 깨어 보니
아버진 어느새 눈을 뜨시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계신다.
"어떠세요? 이제 괜찮으세요? "
"응... 아주 편안하다. 아프지 않으니 살 것 같구나.
그런데 이 주사기를 평생 차고 다녀야 한다니...
이게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지.."
"평생"이라는 말이 생경스럽게 들린다.
아버진 아직도 당신이 평생을 사신다고 믿고 계시는 구나.
아버지의 평생은 얼마만큼일까.
3년? 아니면 5년정도?
의사는 몇달을 사실지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순간 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 해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상과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갖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니야.
그러면 얼마나 절망하실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조금만..
"소변이 안 나오는 구나. 배가 꽉 찬 느낌인데.
이상하구나."
"걱정마세요. 아부지. 이제 통증도 가셨으니 곧 보실 수 있을꺼예요"
추우시다면서 이불을 덮어 달라는 아버지께 담요을 덮으려고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침대 시트를 만져 보니 흥건하게 젖어 있다.
아마도 마취가 덜 풀려서 감각이 없으셨던 것 같다.
서둘러 옷을 갈아 입혀드리니 화장실에 가시겠단다.
한쪽 손에 링겔병을 들고 한쪽 손으로 부축을 하고
화장실로 가는데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휘청거린다.
한쪽 손으로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애 쓰시는 모습을 보고
옆 침대의 어린 환자가 재빨리 달려와 부축을 한다.
그 환자는 팔이 골절되어서 기브스를 했는데 기특하게도
성한 팔을 내밀며 자기를 붙잡으시란다.
겨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신 아버지
정말 오랜만에 시원하게 일을 보신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소변줄기를 보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아버지~~ 정말 시원하시겠다. 히히히~~~"
"그래~~ 이제 살 것 같구나.."
다시 어린 환자와 옆침대에 병문안 온 젊은 남자의 도움으로
겨우 보호자용 침대에 아버질 앉히고 침대 시트를 가는데
가만히 보니 아버지 팔에 꽂힌 링겔 주사줄에 피가 역류해서
줄이 새빨갛다.
아까 화장실에 갈때 너무 링겔주머니를 낮게 들었던가 보다.
새 시트를 깐 침대에 다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아버질 눕히고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달려와서 다시 주사바늘을 꽂는데 그 사이에 벌써
피가 응고 되었던지 주사줄에서 젤리처럼 굳어진 피가
빠져 나온다.
아버진 다시 평온하게 잠이 드셨다.
세탁물을 갔다 놓고 돌아 와 생각하니
깜빡 잊은 것이 있었다.
아버지 속옷까지 그만 함께 세탁실에 두고 온 것이다.
황급히 다시 세탁실로 가서 찾아보니 그 사이에 벌써
몇개의 세탁물이 쌓여서 찾을 길이 막막하다.
새것으로 사드려야 겠다고 포기를 한다.
더러워진 손을 비누로 박박 닦고 돌아 와
마취에서 풀리지 않은 왼쪽 다리를 주무른다.
아직은 튼튼해 보이는 다리가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더 많은 고통의 시간을 줄 것이라 생각하니
걱정스럽기도 하다.
시계를 본다.
오후6시가 조금 넘었다.
변기통을 깨끗이 씻어다 침대옆에 걸어두고
서둘러 집으로 갈 준비를 한다.
"저.. 갈께요.. 소변 보시고 싶으시면 화장실 가지 마시구요.
여기다 보세요. 다리는 마취 풀리시면 괜찮아 지신댔어요."
"그래... 수고했다. 어서 가봐라. 길 막히기 전에."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한번 아버지께
손을 흔들며 병실문을 나선다.
유월의 햇살이 하얗게 보도에 쏟아져 내리고 있다.
병원뜰에 피어나는 합환화가 너무도 아름답다.
공작새의 깃털처럼 우아한 꽃송이가 하나 둘씩 피어나고
있다.
흔들리는 잎새들이 몸을 부비며 춤을 추고..
파란 셔틀 버스가 기다리는 저편에 화사한 색색의 장미가
눈부신 햇살속에 깔깔대며 웃고 서 있다.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병실 밖은 바람마져 상큼하게
느껴짐은 어인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