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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힘든가 보다


BY dansaem 2002-06-09

남편이 요즘 힘든가 보다.
힘 들겠지. 왜 힘이 안 들겠는가.

새벽 5시면 일어나 들에 나가고
9시나 10시쯤엔 밥 먹고 출근하고
(일주일에 한두번은 6-7시경에 출근할 때도 있다.)
5시 반쯤에 퇴근하면
옷만 갈아입고 다시 밭으로 간다.
그리곤 8시 반이나, 늦을 땐 9시 반까지 일을 하니....
매일 매일 이런 일상의 반복이니
무쇠로 만든 몸인들 어찌 힘이 들지 않을까.

"여보, 요즘 힘들지?"
"여보, 힘들어?"
"무슨 일 있어?"
가끔씩 남편의 안색을 살피면 묻는 질문에
그이는 아직 한번도 그렇다고 대답한 적이 없다.
거짓말인지 참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니! 힘들긴..."
그이의 대답은 항상 이렇다.

가끔은 아내인 내게 도움의 손짓을 보내기도 하지만
난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약간의 노동을 보태면 온갖 생색을 다 내고
좀더 솔직히 말하면
온갖 핑계를 대면서 안 하려고 애를 쓴다.

솔직히,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땡볕 아래서 비지땀 흘리며 일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팔다리가 오이나 풀 따위에 쓸리면
가렵고 쓰리기 때문에
긴바지 긴팔 옷을 입고 해야하니
더 더운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몇 시간만 하고 나도
햇빛에 노출된 부분은 표가 나게 그을린다.
안 그래도 둘째를 낳은 후 기미가 끼기 시작했는데....

나도 시골에서 자랐다.
대부분 시골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도와
농사일을 많이 거든다.
학교 갔다오면 가방만 던져두고
밭으로 가야했던 아이들이 많았다.
아니,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골아이 치고는 우리는 농사일을 별로 안 한 편에 속한다.
부모님들이 그다지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가끔 시키는 일도 우린 꾀를 부리며
고랑에 앉아 놀기만 했으니...ㅎㅎ

하여간 농사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어떤 종류의 노동보다도 힘든 일이 농사가 아닐까?
한 여름의 뙤약볕,
예고 없는 소나기,
포기 속에 숨어있는 모기와의 전쟁,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
뽑고 돌아서면 다시 자라는 풀,
그리고 다 지어도 팔 데가 없는 농산물,
가끔은 병충해 때문에 열매하나 얻지못하고 뽑아내야 할 때도 있고,
다 팔지 못해서 버리거나 썩히는 것들까지....

어찌보면 희망이 안 보이는 듯도 하다.

오늘 점심 때였다.
밥상을 차렸지만 그이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한다.
아마 더위에 지쳐 밥맛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먹어야 한다고,
먹지 않으면 진짜로 더위 먹는다며
억지로 밥상앞에 앉혔다.
몇술 뜨다 말고
"사는 게 이래선 안 되는데..."
하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그 말만 던지고는 입을 다문다.
기분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아서
일부러 쾌활한 척 말을 붙이고 이야기를 건네봐도
묵묵부답이다.
몇 번을 그러다 나도 그만 두었다.
속으로 은근히 부아가 난다.

'쳇, 농사 짓는 게 무슨 유센가?
조금만 힘들면 저렇게 인상쓰고 사람 속을 뒤집고 있어.
그러게 누가 농사 지으라고 떠밀었나?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일인데 무슨 유세가 많아?
그렇게 힘들면 농사를 좀 줄이지.
좀 줄이고 조금 덜 쓰고
좀 더 마음 편히 지내자고 내가 몇번이나 말했건만
저렇게 바쁘고 힘들 땐 한번씩 심통을 부리고....'
어쩌고 저쩌고, 궁시렁 궁시렁....
속으로만 쫑알거리면서 혼자 삭이고 있었다.

몸도 힘들고
밀린 일이 많으니 마음의 여유도 안 생기고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니
자기도 힘들고 짜증이 나겠지.
바쁜 일에 ?겨 정신없이 일 하다가도
한번씩 저렇게 힘들고 짜증날 때가 있나 보다.
항상 여유있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만은)
오죽할까?
그이는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고
나머지는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지?"

상을 치우다 보니
남편은 양치질을 하고는
옆에 어머님 집으로 간다.
아마 아이들을 피해서 한잠 자러 가겠지.

막내를 업고 설겆이를 하는데
위의 두 놈들이 싸우고 울고, 몇번이나 서로 일러주고...
그러다 결국은 두 녀석 다 혼이 나고
팔을 들고 있으라고 벌을 세웠다.
설겆이를 마치니 등에 업힌 은이는 잠이 들었다.
일요일이라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여기 재워놓으면 삼십분도 못 잘 것은 뻔하다.

애를 업고 어머님 집으로 가니
남편은 텔레비를 켜놓은 채 잠이 들어었다.
이불을 펴서 아기를 눕혔다.
방안에 파리가 여러마리가 날아다닌다.
잠 잘때 파리가 솔솔 기어다니면 얼마나 성가실까.
파리를 몇마리 잡은 다음에 테레비를 끄고 조용히 나왔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것이
저절로 사그라진다.
이해는 하지만 화가 나던 것이
그래, 이해하지. 얼마나 힘들겠어? 하는 맘으로
서서히 바뀌어간다.

한잠 자고난 남편은 간식을 좀 하고는
다시 밭으로 갔다.
자고 있던 막내도 이제 깼다.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밭에 가 보아야겠다.
별로 도움은 안 되더라도
옆에서 수다라도 떨어야지.

그러면 남편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