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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등교길


BY 김도수 2001-04-23

◇ 추억의 등교길

작년 추석연휴 첫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2년)과 아들(1년)에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등교 길을 체험 시키고 싶어 5일마다 열리는 시골 장터에서 흰 고무신 두 켤레와 책보 두 장, 옷 핀 한 줄, 멸치 한 포대, 계란 한 판을 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님께서 봄, 가을 소풍날에는 특별히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 볶음과 계란탕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셨는데 그 도시락 반찬을 똑같이 싸서 가지고 갔지요. 아내는 도시락을 들고 아들과 딸은 책을 책보에 둘둘 말아 옷 핀을 책보 끝 단에 꿰매어 마무리 한 후 딸은 허리에, 아들은 어깨에 둘러메고 고향 집 마루를 출발하였습니다.

마루를 출발한 큰딸이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책보를 허리에 풀면서 책보만은 멜 수 없다며 벗어 버렸습니다. 당황한 나는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빠가 다녔던 초등학교 강둑 길은 걸어서 갈 수는 있지만 책보는 메고 갈 수 없다며 동네 회관 앞에 추석 지내러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있기 때문에 창피하여 도저히 지나 갈 수가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풀어진 책보를 다시 허리에 메어 줄려고 하니 절대로 메지 않겠다며 울며불며 떼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도시아이들은 엎어지면 닿는 곳에 위치해 있는 초등학교에 비가 오거나 바람만 불면 자가용이나 학원차량으로 태워다 달라고 조르는데 큰딸에게 할 수 없이 사랑의 매를 한 대 댔습니다. “어차피 아빠의 초등학교 등교 길 체험 학습이니 아빠와 고모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해야만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으니 힘이 들고 창피하더라도 옛 모습 그대로 하자”고 달래어 어렵게 출발을 했습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걸음걸이는 걸어가기 싫은 터벅터벅 팔자걸음이었습니다.

고향 집 마당을 출발한 우리가족이 마을 회관 앞에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웃고 계셨습니다. 고향마을 분들께 아들과 딸에게 초등학교까지 걸어서 갔다 오는 체험교육을 실시하는 중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이 되겠구먼" 하시며 어서 갔다 오라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강둑 길을 따라 초등학교에 가는 오솔길에는 아침이슬이 우리 가족들을 반겨 맞으며 바지를 촉촉이 젖 셔 줬고, 논두렁 길에는 황금 빛 들녘으로 고개 숙인 벼 이삭들이 한 걸음 한 걸음에 걸을 때마다 발길에 맞춰 바람결에 흔들흔들 춤을 추었습니다.

둘째 아들녀석은 누나가 한 대 얻어 맞은걸 본 후로는 힘이 드냐고 물을 때마다 재미있다며 뛰어 가기도 하고 강아지풀을 손에 쥐고 논두렁에 심어진 콩잎들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며 열심히 걸어갔습니다. 큰딸의 풀어진 팔자걸음을 멈추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강둑 길을 따라 가는 오솔길에는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풀들이 우거져 터벅터벅 걸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마을에 초등학교 학생이 끊긴 지 벌써 9년째가 되는 등교길 이었으니 길은 많이 변하여 강둑 길은 논으로 변하여 없어지고 논두렁과 강둑 길을 번갈아 가며 힘들게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40분 정도를 걸어서 초등학교 모교에 도착하니 교무실에서 50대 후반의 남자 일직선생님께서 현관으로 나오시더니 아들과 딸의 허리와 어깨에 메어져 있는 책보와 아내와 내가 신고 서있는 흰 고무신을 쳐다보시더니 "교직생활 30년 만에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는 처음" 이시라며 반갑게 우리가족을 맞이해 주셨습니다.

졸업한지 28년 만에 찾아간 초등학교는 600여명의 재학생에서 29명으로 변해 있었고 5학년 때 교실 앞 돌 축대 위에서 뛰어 내리다 팔이 부러져 아파서 울었던 곳도, 20원짜리 고무공이 언덕으로 굴러가 버려 며칠을 울면서 바라다보았던 학교 앞 언덕도 흘러간 세월 속에 묻히고 학교 앞으로 흐르는 맑은 강만이 긴 세월을 접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은 졸업식 행사를 했던 강당뿐이었는데 내가 졸업식 때 모범생으로 우체국장님 상을 받았던 교탁이 놓여져 있던 곳에 오래도록 내 시선이 머물러 있기도 했습니다.

점심때는 어머니께서 1년에 단 한번 유일하게 학교에 찾아 오셨던 가을운동회날, 점심시간마다 형과 내가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던 쌍 벚나무 아래로 새롭게 구성되어 나타난 가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운동회 날 아침, 남들처럼 일찍 못 오시고 항상 농사일을 하시다 늦게 오시는 어머님은 운동장 앞쪽 모서리에 서있는 쌍 벚나무 장소가 우리가족의 점심 약속장소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운동회 날 아침식사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형과 나에게 “벚나무 두 그루 서있는 곳에서 점심때 만나자“ 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지 28년. 이제 새롭게 구성되어 나타난 가족들은 벚나무 두 그루아래서 자리를 펴고 앉아 어머님이 소풍 때나 특별히 싸주셨던 멸치볶음과 계란탕을 꺼내어 점심을 먹었습니다.

딸과 아들은 걸어오는 등교 길이 힘이들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위 아래로 뜨면서 점심밥을 맛있게도 먹어댔습니다. 오랜만에 어머님의 그늘 아래서 먹어보는 점심밥, 참 맛있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맛있게 먹어대는 모습을 보니 젊었을적 나의 어머니도 지금의 나처럼 어린자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겠지?

오늘 밤은 쌍 벚나무 사이로 떠오른 둥근 달이
빠끔하게 뚫린 고향 집 안방 문구멍 사이로
잠든 우리가족들을 밤새도록 환하게 비추고 있으리라.

초등학교 등교길 시냇가에 놓여져 있던 징검다리가 없어져 어린 자식들이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돌다리를 건너가는 모습도, 생산이 중단되어 검정고무신을 신고 황토 길을 간 지러 줄 수도 없었지만 아들과 딸이 밟고 지나간 강둑 길과 논두렁의 등교길 체험은 그들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그리운 추억을 가슴속에 담았으리라.

책보가 흘러내려 여러 번 고쳐 메야 했던 불편함도, 들풀 길을 헤치며 가야 했던 오솔길도, 바지를 젖시며 걸어야 했던 아침이슬 길도,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았던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도, 자식들이 언젠가는 좁혀 나가고 밟아야 할 길임을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배우며 깨우칠 수 있으리라. 그날 딸과 아들의 일기장에는 “다리도 아프고 힘이 들었지만 점심이 너무나 맛있었고,아빠는 이렇게 먼 길을 어떻게 다녔는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너무나 힘든 하루였다‘고 적고 있었다.

<진뫼마을 명예이장 김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