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팔남매의 맏이다.
우리는 그 팔남매를 낳은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큰 언니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떴다고 하였다.
단지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대단한 성깔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할머니는 그 후에 할아버지의 재취로 들어온 서할머니다.
서할머니는 평생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할머니 이야기다.
다른 할머니들 하고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가 많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 중의 하나는 라듸오를 켜 놓고 위 아랫 마루를 춤을 추고 다니면서 흥겨워하는 모습이다.
티비를 보면 사극에 나오는 기생이 술자리에서 추는 그런 춤이다.
기생 출신은 분명 아니었다고 하는데 어찌 그런 춤을 잘추고 즐겼는 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부잣집의 고명딸이어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고 하였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남편이 후처를 들였는데, 그 꼴을 볼 수 없어 시집을 뛰쳐나와 친정에 있다가 우리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하였다.
할머니가 살던 시대의 다른 여자들 하고는 생각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시대 여자는 그저 참고 사는 걸로 우리는 알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들의 모임에 갔다가 토라져 오기도 잘 했다.
자기를 최고로 대우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는다고...
할아버지가 받는 대우를 당연히 자기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그 때는 남의 재취로 들어 간 사람은 한 등급 격을 낯춰보던 세상이었는데도...
이야기로 듣기는 남의 재취로 들어간 사람은 자기 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하게'투의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 것이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 우리 할머니가 살던 때의 격식이었단다.
막내 고모가 만 두 살일 때 우리집에 오게 된 할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은 전혀 관심이 없고 아내의 역할과 시어머니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었던 듯 하다.
이런 할머니의 베개 밑 송사에 할아버지는 잘 넘어간 것 같다.
우리 집에 간혹 분란이 일기도 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할머니의 고자질이 있었던 것을 보면...
할머니는 막내 고모가 다 자라 결혼을 할 때 까지 서로 앙숙이었다.
할머니와 막내 고모의 싸움의 불똥은 번번히 어머니에게 튀었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농사지은 곡식도 자기 허락없이 팔아서 비누를 사서 썼다고 할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단다.
자기를 어른 취급을 안한다고...
그 할머니는 여성의 위치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 때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은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다른 여자들 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 책을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한 책은 '홍루몽'이란 책이었다.
할아버지가 읽기도 하고 할머니가 읽기도 했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 우리는 그 줄거리를 다 외울 정도였다.
책을 읽기도 하고 화투를 치기도 하였다.
육백점이 먼저 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었는 데 우리는 그 옆에서 점수를 대신 계산해 주는 것이 커다란 재미 중의 하나였다.
할아버지가 가끔 시침 뚝 따고 속임수를 쓰기도 하였는데, 다 이긴 판을 지고도 그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할머니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할머니가 떼를 쓰면 못 이긴 채 한 판 쯤 잃어주는 할아버지를 보는 것도 좋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는 일방적으로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받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아끼고 응석을 받아 주는 쪽에 가까웠다.
우리는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여자하고 한 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할머니를 좋아할 수 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할머니하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우리 어머니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할머니를 보면서 우리의 가치관을 정립할 때 균형 감각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처럼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무조건 참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라, 참긴 하되 필요하다면 당당하게 나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자연스레 감정을 표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정숙하기만 했던 어머니 대신 할머니를 보면서 여자는 남편에게 적당히 애교를 부리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함께 살 동안 할머니를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 미안하다.
할머니가 내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그 때 깨달았더라면 좀 더 잘했을텐데...
아뭏든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 하면 어린 시절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니까...
우리집에 들어와 세상을 떠나던 날 까지 사 십 년 가까이 우리 가족과 함께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