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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55


BY 녹차향기 2001-02-13

어르신들이 가끔 욕을 하실 때가 있어요.
성격이 급하신 저희 시어머님도 남쪽 지방이 고향이신지라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불쑥 욕을 하실 때가 있거든요.
가령 텔레비젼을 보다가 어린 가수들의 희한한 옷차림을 보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염병하네..."
(염병 : 흔히 전염병을 말하며 장티푸스를 일컬음)

또는 너무 우스운 소리를 해대는 개그맨들에겐
"오살할 년..."
(오살하다: 다섯오, 죽일 살..다섯번을 죽인다는 말로 엽기적인 죽임을 말한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주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쓰시지요.
"오메오매...염병할 년,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네... 오살할 년, 연락도 않구 어떻게 지냈어?"


그렇게 어머님께서 사용하시는 욕이 단순 불쾌한 감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욕이 아닌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어요.
처음엔 무척 당혹스러웠지요. 행여 주위에 누가 있는지 고개를 돌려 두리번 거렸고 옆에 서 있다가 은근히 한걸음 뒤로 물러섰으니깐요.

결혼초, 부엌에는 서 있었지만 콩나물도 제대로 무칠 줄 모르는 무식한 며느리 앞에서두 어머님은 가끔 욕이 먼저 튀어나왔어요.
물론 매번 그러신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번 그런 말을 들으면 눈물이 좍좍..
생전 그런 말 근처에 가 본적도 없었거니와 행여 내가 알던 어떤 사람이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그 인격됨을 의심하였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며 스스로 멀어지곤 하였었는데, 시어머님은 가족이 아닌가?

몇년인가를 참고 있다가 어느 날 드디어 시어머님께 반항을 했어요. 아주 과감할 정도로. 매우 큰 용기가 필요했구요. 목소리는 떨렸어요.
"어머님, 제게 왜 욕 쓰세요? 저 그런 욕 얻어먹을만한 실수 한 것도 없고요, 그렇게 자라지도 않았어요....
앞으로 제게 그런 말 쓰지 않으셨음 좋겠네요.."
어머님의 놀란 토끼눈,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의 말씀속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을.

문화의 차이와 시공간의 차이..
그리고 시대적 배경의 차이를 극복하여 그 말을 그저 다른 단어와 다름없다고 이해하게 되기까지 마음 속에 쌓인 수북한 껍질들이 허망하기 까지 하거든요.
오늘도 그 말 한마디를 들었어요.
"염병하네....."
ㅋㅋㅋㅋㅋ

그 말에 아직도 가끔 서운함을 갖지만, 아직도 분노의 불씨를 갖지만 어머님께서는 며느리를 걱정하며 하신 말씀이었음을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 한편 구수하게 들리기 조차 하니...
어쩌죠?
저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이 한마디 툭 튀어나오면 어쩌죠?


모두들 평안히 주무세요.
박라일락님께서 좋은 밤을 맞으셨음 좋겠네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