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결혼 전 같이 살집에 대한 이자부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41

물같은 사람...


BY my꽃뜨락 2001-10-30



제대말년이라고, 그동안 쌓여진 휴가 ?아 먹느라 남편은
거의 실업자 수준이다. 실업자 남편 둔 마누라들은 어찌
생활하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나는 남편과 하루 종일 코
맞대고 있는 것에 갑갑증이 나 좌불안석에 정서불안까지
?아올 지경이다.

평소에는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약속도 많고, 술자리도
많던 남정네들이 집안에 들어앉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많던 친구, 약속이 간 곳 없고 방안퉁수가 되기 십상이니.
가뜩이나 머리 복잡한 남자, 짜증을 낼 수도 없고 아무렇
지 않은 듯 표정관리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우리 부부는 바람을 쐬기로 했다.
목표는 무등산 백마능선. 장불재에서 증심사 계곡으로 내
려 오거나 아니면 입석대까지 가는 정도로 무등산을 탔던
지라 소 잔등처럼 부드러운 백마능선은 먼 발치에서, 항
상 아쉬움으로 바라보던 그리움의 땅이었다.

산책하듯 별 준비없이 버스에 오른다. 고만고만한 나이에
할 일 없어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간편한 등산복 차
림에 삼삼오오, 이야기꽃이 한창이다. 종점 산장에서 내
려 산행을 시작한다. 다람쥐와 산비들기, 이름모를 새들
의 노님이 활발한 오솔길에 쓸쓸함을 보태주듯 우수수 낙
엽지는 소리가 휘감아 든다.

투드득, 뒤늦게 다람쥐 모이 걱정이 됐는지 단체로 낙하
하는 도토리들의 합창소리. 숲 속의 교향곡을 감상하며
한갖지게 남편 손잡고 장불재까지 난 비포장도로로 들어
서니, 멀리 또는 가깝게 무등산 능선의 단풍이 잔잔하다.
가파른 산길이 부담스러워 평이한 임도를 택했지만 너무
나 조용한 사위가 늦가을 소풍의 운치를 더해준다.

한국통신의 철탑이 거대한 장불재에서, 어쩌면 옛날 백제
인의 무덤인지도 모를 고인돌처럼 생긴 넓다란 너럭바위
위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신다. 입석, 서석대의 병풍같은
바위가 하늘 가까이 치솟아 있는 아래 시들은 억새군락과
노랗고 붉은 단풍에 물들은 산허리가 장관이다.

부드럽게 활처럼 휜 능선 아래로 가을바람에 춤추듯 휘날
리는 억새밭이 아름다운 백마능선. 왜 그 이름이 백마능선
이라 이름지어 졌을까? 억새풀 속에 남편과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옅은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청명하지
않지만 차분함이 다정스러운 가을하늘을 가슴 속에 담아
보며.

화제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 남편의 향후 거취문제로 옮겨
졌다. 쓸데없는 얘기지만 희망했던 자리에 탈락했던 과정을
다른 이에게서 듣고난 뒤, 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던 상
태였다. 남들은 얼굴 철판 깔고, 빤스 벋고 뛰듯이 빽이란
빽은 사돈에 팔촌까지 들쑤셔 치열한 인사청탁을 했다는 후
문인데 내 남편은 젊잖게, 순리대로 이력서 내놓고 모셔가
라는 듯 멍청히 기다렸으니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알아서
모셔가겠는가?

이런 성격의 인간이 남의 서방이라면, 사람 좋다고 점수 후
하게 처주련만 내 서방이 이러면 그때부터 갑갑해지가 마련
이다. 너무 원칙적이고 옳고 그름의 분별이 날카로워 웬만한
일에는 적응이 어렵다. 얼마 전에 남편과 아주 가까운 후배
하나가 같이 일을 해보자고 운을 띄었다. 건설업을 하는 후
배였다.

사업을 잘 키워 확장을 하는 중이었다. 가난하고 요령없고
제대로 안풀리는 선배가 안타까웠나보다. 그러나 건설업이
어떤 일인가? 로비와 뇌물이 앞서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
지 않은가? 남편과 후배는 고민하다 유보를 해버리고 말았
다. 오나가나 남편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문제가 되었던 것
이다.

건설업이란, 돈과 술과 여자가 끼지 않으면, 부드럽게 청탁
하는 재주가 없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나기 힘든 까닭이었다.
참 내! 빤스는 못벗더라도 런닝을 벋을 정도의 넉살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어쩌다 이런 답답한 인간을 만났던가!

나는 물같은 사람이 좋다. 어느 그릇에 담아도 편안한 물
같이 넉넉한 사람이 좋다. 귀여운 옹달샘도 좋고, 촌노들
친구가 되어주는 실개울도 좋다. 황하처럼 탁하면 어떠리,
한강수처럼 온갖 찌꺼기에 오염되면 어떠리, 명경처럼 맑
은 물도 귀한 것이지만 탁하고 오염된 물줄기도 이 세상
에는 필요하고 귀한 것이거늘...

철옹성처럼 단단하고 굳건한, 자기가 옳지 않다 여기면
절대로 침범을 허락치 않는 딱딱한 나무그릇같은 사람은
답답해서 싫다. 우리 아이들은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실리도 챙길 줄 아는 물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안이 넉넉해져야 남을 챙길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내
생각이 자유자재로울 때 다양한 형태의 인간군상을 담을
수 있는 것이거늘. 편안한 친구, 기대고 싶은 지도자, 신뢰
할 수 있는 동료...그 안에 내 아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