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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후에 - 내겐 너무 외로운 가을


BY 물빛 2000-09-18

*** 내겐 너무 외로운 가을 ***

가을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세상을 내려다 본다

그가 곁에 있을 때
내가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일은
그의 퇴근 무렵이었다

다 저녁에 청소를 하고
머리를 감고
화장을 고치고
음악을 틀고
그리곤
그의 하얀 승용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었다
내가 미처 일상에 지치기 전에
아직은 그의 진실한 친구로 남아 있을 때,
좋은 모습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
기억의 문을 닫아 버렸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거울을 보고
가글을 하고
밝은 웃음으로 늘 초인종을 누르며
현관을 향기롭게 거느리던 그가 미처
반복되는 채비에 권태를 느끼기 전에
아직은 나의 가장 진실한 친구로 남아 있을 때
좋은 빛깔 좋은 향기만 남긴 채
떠나 버렸다

그 영혼에 흐르는 쓰린 눈물을 나는 안다

그의 체온은 내겐 너무나 익숙해서

손이 넷 달린 꽃처럼
사랑을 했다
이제
두 손이 잘린 나는
남은 두 손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내 발이고 내 머리이고 내 가슴이던 그가
모두 남김 없이 챙겨 떠나 버려서
온 몸 구석구석을 헐려 버린 나를
어떻게 추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홀로서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두 다리로 홀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바람이 차고, 곧 눈이 오리라

나를 잃은 그대,
차고 지루한 이 시간들을
어떻게 감당하며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땅 속은 너무나 차가와서

아파트 주차장엔 하얀 승용차가 너무 많다

사람들은 가을이 외롭다지만
내겐
삶이 더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