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도 뒤따라 나선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다.
“잠깐!”
“왜?”
뫼가 뛰어가다 멈추어 선다.
“아까 하려던 말? 뭐야?”
“아까 언제?”
“언제긴? 이균의 방에서지.”
“아 그거?”
“그래. 그거?”
“내가 마우스를 움직인 게 아니야. 마우스가 알아서 저절로 움직였어. 난 커서가 멈추면 누르기만 했어.”
“정말?”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대체 놈이 노리는 건 뭐지?”
“배고픈데, 밥부터 먹으면 안 될까?”
“그래. 밥부터 먹자!”
둘이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넷이 분주하게 오가며 식탁을 차리고 있다. 고깃덩어리는 이미 식탁에 올려져있다. 다리가 긴 게 토끼는 아니다.
“이건 뭐야?”
뫼가 다가가 살피며 묻는다.
“뭐긴? 일용할 양식이지.”
누리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대꾸한다.
“일용할 양식도 종류가 있잖아?”
“토끼는 아니야.”
“그러니까?”
“고라니. 토끼보다 몸집이 좀 큰 녀석이야. 며칠 전 놓은 덫에 걸렸더라고. 먹을 게 많아서 눈치 보며 먹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실컷 먹어!”
뫼가 군침을 삼킨다. 벌써 구미가 당긴다.
“한데 좀 쉬었냐? 머리 좀 식혔냐고?”
누리가 둘을 흘끗 쳐다보며 묻는다.
“응.”
뫼가 짧게 대답한다. 그런 다음 얼른 식탁으로 마련된 돌 판으로 다가가 먼지를 쓸어낸다. 다들 분주한데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괜히 멋쩍다. 들도 달려들어 거든다.
“또 놈을 상대했던 거야?”
버들이 다가오면서 묻는다. 뫼와 들이 뜨끔한다. 그 말에 누리가 둘을 훑어본다. 누리의 시선이 따갑다. 뭔가 냄새를 맡은 것처럼 쳐다본다.
“내가 말했지? 숨기기 없기라고. 너 그러겠다고 했어? 나 그 말 이 안에 담아두고 있어.”
누리가 가슴을 손바닥으로 토닥인다. 뫼와 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잔치 여기서 끝낼 건 아니지?”
누리가 둘을 은근히 협박한다. 둘은 머뭇거린다. 모두를 위험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자신들도 겨우 빠져나왔다. 게다가 한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는 긴장된 시간이었다. 이균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행여 이균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아직 손에 쥔 게 뭔지 확실하지도 않다.
뫼는 못들은 척 딴 짓을 한다. 들은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바쁘다. 언젠가는 모두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털어놓는 것도 때가 있다. 뿔뿔이 흩어진 다음엔 털어놔 봐야 소용이 없다. 떠나간 마음은 붙들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털어놓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랬다가 행여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그것도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참 난감하다.
“나도 누리와 같아. 숨기지 말고 말해!”
이든이 재촉한다.
“그래. 뭔지 좀 우리도 알자. 니들만 알고 있지 말고.”
아미도 이든을 편들고 나온다. 들과 뫼가 서로 눈치만 본다. 둘 다 털어놓기에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든이 지쳤는지 돌 판으로 가서 앉는다. 아미도 가서 앉는다. 뫼와 들도 눈치를 보다 머쓱하게 가 앉는다. 아무도 말이 없다. 가끔 숲 쪽을 한 번씩 바라볼 뿐이다.
말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자니 좀이 쑤신다. 졸음도 눈가에 내린다. 눈이 가물가물해진다. 해는 머리 위에서 출렁인다.
“알았어. 말할게.”
뫼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든다.
“진작 그럴 일이지. 괜히 분위기만 무거웠잖아.”
누리가 무거움을 털어내듯 말한다.
“네 번째 것을 열었어.”
뫼가 뜸을 들이며 말문을 연다.
“뭐라고?”
“잘못 되면 어쩌려고?”
“그거, 놈이 있는 곳으로 가는 통로라 하지 않았어?”
다들 놀라서 한마디씩 한다.
“맞아. 통로였어.”
“한데 어떻게 돌아온 거야?”
“놈이 그곳에 없었어.”
“지금 떠오른 생각인데, 놈의 작업실은 하나가 아니야. 여러 개야. 놈은 다른 작업실에 있었던 거야. 아마 거기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을 지도 몰라. 웹캠 같은 걸로.”
들이 추리해낸 걸 말한다.
“왜 나타나지 않은 거지? 잡아 놓은 거나 다름없었을 텐데.”
“우리 둘이여서였겠지. 안심시켜서 맘 놓고 드나들게 만들겠다는 속셈도 있었을 테고.”
“소름 돋네. 문이 있었을 거 아냐? 열어보지 그랬어?”
아미가 몸을 움츠리고 묻는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은 보이지 않았어. 모든 게 시스템 그걸로 움직이고 있었어. 그걸 찾아 확인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다른 건?”
“알아내지 못했어. 뫼가 잘못될까봐 서둘러 빠져나왔어. 원래 뫼는 날 잡고 있다가 놔주기로 했었거든. 나만 들어갈 생각이었어.”
다들 뫼를 본다. 뫼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뫼가 안 된다는 걸 내가 원했어. 뫼보다 내가 좀 더 안전할 거 같아서. 한데 난 통로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어. 뫼에게 밀려서 갔던 거야. 통로를 빠져나가서 보니까 뫼가 옆에 함께 있더라고. 그래서 서둘러 되돌아왔어. 이게 다야. 헌데, 우리 얼굴에 그게 써 있든? 그걸 어떻게 알았어?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위험해질까봐 당분간 말 안하려고 했는데.”
들이 나머지를 털어낸다.
“그동안 겪어온 걸로 체득된 직감.”
버들이 시원스럽게 대답한다. 뫼는 직감이라는 말을 되새김한다. 뭔가 끌려올 거 같은 기분이다.
“뫼?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데?”
버들이 팔꿈치로 뫼를 툭 친다.
“직감이라는 니 말.”
“그게 왜?”
“느낌이 묘해.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 꼬물거리는 느낌이야.”
“웃겨. 형체도 없는 단어가 꼬물거리기는?”
버들이 말꼬리를 잡는다. 버들 때문에 무거워야 할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우리 참 기특하다. 다들 그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도 이렇게 멀쩡하잖아. 미소까지 지으면서.”
“단련이 됐잖아.”
“그뿐야? 잘 헤쳐 나갈 거라는 믿음도 이 안에 있잖아.”
이든이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툭툭 친다.
“모두가 있어서 든든해.”
뫼가 가만있다가 고마움을 드러낸다.
“봐! 우리가 이렇게 뒤에서 받쳐주고 있으니까 힘이 솟잖아. 그러니까 숨기지 마! 우리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는 내던져 버려! 내 직감이 바로 움직일 테니까.”
버들이 속을 들여다볼 것처럼 얼굴을 들이민다.
“알았어.”
“그 말 몇 번째인 줄 알아? 못해도~.”
“알았어. 이젠 정말 새겨둘게.”
뫼가 얼른 누리의 말을 자르고 들어간다.
“오늘은 든든하게 채우고 쉬어! 우리 몸은 기계가 아니야. 컴퓨터가 아니라고. 또 알았어 하고 뒤에서 놈에게 들이대지 말고.”
누리가 뫼를 겨냥하여 말못을 박는다. 뫼도 오늘은 모든 걸 내려놓고 쉬자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지 말고 숲에 다녀오자! 오늘만이라도 뫼의 머릿속에서 놈들을 빼내주자! 운이 좋으면 토끼도 두어 마리 잡아오고.”
이든이 누리와 뫼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한다.
“좋은 생각이야.”
누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친다. 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든과 누리가 뫼의 팔을 잡아 끈다. 뫼가 끌려가다 제 발로 뛰기 시작한다.
“내일도 고기 맛을 볼 수 있을까? 오늘 고라니 죽여줬는데.”
버들이 입맛을 다신다. 모두 다 운명과의 한판 승부를 내려놓은 듯 말한다. 하지만 속 깊은 데선 여전히 그게 꿈틀거리고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꾹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다.
웃고 떠들다가 숲으로 가서 열매를 따온다.
“누리가 토끼 두 마리만 잡아왔으면 좋겠다. 열매만 먹을 때보다 속이 든든해.”
버들이 고기를 먹고도 성이 안 차는지 군침을 삼킨다. 들도 아미도 입안에 침이 가득 돈다. 버들 말대로 고기를 먹고부턴 속이 든든하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 그렇다.
뫼와 누리, 이든은 토끼 한 마리씩을 손에 들고 온다. 얼굴은 온통 웃음꽃이 가득하다. 들과 아미, 버들은 횡재한 기분이다. 덩달아 웃음꽃을 피워낸다.
“야, 누리. 너 어떻게 내 마음을 꿰뚫었냐?”
버들이 누리에게서 토끼를 낚아채며 말한다. 기겁하면 뒤로 빼던 것을 생각하면 미꾸라지 용 된 격이다.
들은 낙원이 있다면 이곳이 낙원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니 마음? 난 그런 거 못 꿰뚫었는데?”
누리가 정색을 한다.
“그럼 어떻게 토끼를 세 마리나 잡아왔는데?”
버들은 누리의 말 따윈 벌써 멀리 흘려보낸 표정이다.
“먹고 싶어서. 너까지 생각이 미칠 겨를도 없었어. 내 몸의 세포들이 먼저 움직였어. 한데 니 생각이 났겠냐?”
누리가 시치미인지 사실인지 모를 말로 버들을 놀린다.
“고물이 제법 되겠네. 것만 받아먹어도 되겠어.”
버들은 누리의 놀림 정도로는 주눅이 들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다.
“내가 졌다. 고물이 아니라 반 토막 싹둑 잘라줄 테니까 먹어.”
누리가 시치미였다는 걸 드러낸다.
날이 밝자마자 다들 기지개를 켜며 모여든다. 이든은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어 피운다. 누리가 거죽을 벗겨낸 고깃덩어리를 손에 들고 온다. 꼬챙이에 끼워 불에 올린 고깃덩어리들이 자글자글 익는 소리를 낸다. 고기 맛이 죽여준다.
“이만하면 아주 근사한 아침이었지?”
누리가 뒤로 몸을 젖히고 하늘을 보며 말한다.
“근사한 아침이었지. 고맙다. 어제 오늘 실컷 고기맛을 보게 해줘서.”
아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다.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든이 그런 아미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본다.
“버들 넌? 제일 반겨놓고 왜 말이 없어?”
누리가 몸을 반듯하게 하더니 난데없이 트집을 잡는다.
“너 못 봤어? 몸으로 확실히 보여줬잖아?”
“언제?”
누리가 또 시치미를 뗀다. 버들과의 말장난에 재미가 붙은 모양이다.
“내가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어댔는데? 너도 세포가 먼저 움직였다면서? 나도 내 세포로 반응했어.”
버들도 지지 않는다. 비실비실 웃기까지 한다.
“내가 또 졌다.”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놈들만 아니라면 천국이고 낙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