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의 머릿속이 멍해진다. 들이 갑자기 낯설다.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거 아냐? 널 손에 넣으려 한다면서? 니 안에 놈들의 욕구가 다 들어있다면서? 그럼 절대 못 해쳐. 그러니 열어보자고.”
들이 졸라댄다. 뫼의 머리가 서서히 움직인다. 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 해칠 생각이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어야 한다.
“알았어.”
뫼가 화면 가까이로 몸을 끌어당긴다. 이균이 깔아놓은 폴더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이거야?”
“응.”
“자료가 서너 개는 될 거 같은데? 그래?”
“거기까진 모르겠어. 겁이 나서 못 열어봤어.”
뫼가 폴더를 클릭한다. 들의 말이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아래로 네 개의 아이콘이 쪼르륵 뜬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열어보자!”
“아이콘 좀 살펴보고.”
“아이콘? 그게 뭔데?”
“저 문자나 그림들. 명령이 담겨 있어. 자세히 살피면 그 명령이 뭔지 짐작할 수도 있어.”
“확실해?”
“장담은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해.”
“그럼 어서 살펴봐!”
“첫 번째 것은 왠지 우리와 관련이 있을 거 같아. 이건 열어봐도 될 거 같아.”
“그럼 열어봐!”
뫼가 첫 번째 아이콘을 클릭한다. 예상대로 뫼와 들, 버들과 아미, 이든과 누리의 모습이 차례로 뜬다.
“니 말이 맞았어. 우리야. 한데 그냥 그림이야.”
“놈이 그린 그림이야. 저 그림에 공학자 놈이 사람의 유전자를 결합시켜서 우리를 만들어냈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모두가 다 달라. 움직임과 표정이야. 여러 개의 그림을 겹쳐놓으면 동작이나 표정이 돼. 아마 동작군이나 표정군은 함께 작동하도록 명령이 내려져 있을 거야. 움직임과 표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 작업인 거 같아.”
“엄청 공을 들였겠군. 들인 시간도 만만치 않을 거 같아. 한데 왜 저 자료를 우리에게 보낸 거지? 보여줘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들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두 번째 아이콘을 보자!”
뫼가 자세히 살핀다. 쉽지 않은 모양이다. 메모지를 꺼내 자판에서 비슷한 글자를 찾아내 두드린다. ‘HTory’가 된다.
“‘HTory’, 뭐지? 약자인 거 같은데.”
“모르겠어?”
“전혀.”
“그럼 아줌마한테 물어보자! 아줌마는 알지도 모르잖아.”
뫼가 인터넷에 접속하여 이선의 카페로 들어간다. 다행히 이선은 집에 있다. 인터폰을 누른다. 이선이 컴퓨터로 뛰어온다.
“오랜만이야. 뭔 일 있어?”
“요상한 게 있어서요. ‘HTory’가 뭔가요? 영어인가요?”
“‘HTory’? 뭐지? 잠깐만. 좀 더듬어보고. 흐토리? 토리, 토리,······.”
이선이 음절을 되풀이해서 소리 낸다.
“history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죠?”
“역사. 역사를 뜻하는 영어단어야. 한데 왜?”
“말하려면 길어요. 나중에 말씀드려도 돼요? 급해서요.”
“그래.”
이선은 흔쾌히 놓아준다.
“역사? 이것도 우릴 해칠 자료는 아닌 거 같아.”
뫼가 들을 올려다본다. 너는 어때 하고 묻는 거 같다.
“내 생각도 그래. 열어보자!”
뫼가 클릭한다. 영문자로 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뭐지?”
“인터넷 주소들이야. 내가 열어볼게.”
2013년 이후의 역사다. 본 기억이 있다.
“지난 번 봤던 그 자료야. 다음 거 하나만 더 열어보자!”
다음 것도 다르지 않다.
“2013년 이후의 자료가 들어있는 주소를 순서대로 올려놓은 거야.”
“치밀하게 작업했군. 상상해서 만들어내는 것만도 장난 아니었겠어. 그래서 우릴 포기하지 못하는 거군. 새로 만들려면 이 작업을 다시 해야 할 거 아냐.”
들이 혀를 내두른다.
“작품이 있어야 할 테고, 작품에 맞는 인물도 있어야 하고, 환경에 맞는 자료도 있어야 해. 그러자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하겠지. 놈들은 우리에게 사활을 걸었어.”
“그러고도 남겠어. 거기다 내게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를 엄청난 권한을 심어놨어. 포기 못해. 다음 아이콘을 보자!”
“책이야. 아줌마 작품인 거 같아.”
말과 동시에 뫼가 클릭한다. 이선의 작품 맞다. 작품을 도로 닫는다.
“마지막 하나 남았어. 세 개는 무사히 통과했어. 마지막은 뭘까?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이 그림 뭘 뜻하는 거지?”
뫼가 들에게 묻는다. 그림인데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글자보다도 더 어렵다.
“어두워. 뚫려있는 거 같기도 해. 열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어째 좀 불길해.”
“문이 있어. 통로인가 봐. 어디와 연결돼 있는 거지?”
대답은 안 하고 고개만 가로젓는다. 들의 표정이 무겁다.
“뫼, 이건 열지 말자! 느낌이 안 좋아.”
“열어보고 나니 그래도 속이 후련하다. 계속 찜찜했었는데. 머릿속이 제법 가지런해졌어. 이젠 놈에게 가 봐야겠어.”
들이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애니의 마음을 짓이겨놓게 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뫼는 되레 차분하다. 짐을 하나 덜어낸 후련함이 얼굴에 떠 있다. 애니를 눌렀다는 기쁨도 서서히 밀려온다. 머리싸움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감도 다가온다.
“괜찮겠어?”
들이 걱정이 돼서 묻는다.
“어차피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야. 되돌릴 수도 없잖아. 차라리 밀고 나가는 게 나아.”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선을 모르겠어.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는데 편하진 않아. 돌아올 보복이 두렵기도 하고.”
“그걸 생각하면 나도 그래. 그래서 두 눈 딱 감으려고. 눈을 뜨고 들여다보면 볼수록 세상이 무섭거든. 남의 걸 훔쳐내고도 멀쩡하고,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다 들쑤시고 다닐 수도 있고.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기도 하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 하지만 우리도 살아야 해. 놈들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구경거리나 노리개로 일생을 살 수는 없어. 너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세상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줄 몰랐지. 한데 2013년의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걸 그들도 느끼고 있을까?”
들의 말에 뫼가 몸을 부르르 떤다. 진저리가 쳐진다.
“글쎄? 느낀다면 살 수 있을까?”
“없겠지? 드라마에서처럼 다들 그렇게 살고 있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다가오는 대로, 혹은 다가가면서 살아내고 있겠지?”
들이 확신이 서지 않는 투로 말한다. 뫼도 확신이 서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드라마에서 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그들은 모두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드라마와 놈들을 놓고 생각하면 참 복잡한 세상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모른 채 현실에 떠밀려 그냥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만약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걸 선택해도 행복하지 않을 거 같아.”
들도 바깥세상을 떠올린다. 요지경 속이다. 뭐가 그런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느낌은 그렇다.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행복은 몸을 사리고 있을 듯하다.
“그래도 행복은 있을 거야?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것들도 수두룩할 거니까. 드라마며 음악동영상 속에도 웃음이 가득하잖아.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생각이 멀쩡한 거야? 놈들이 이상한 거지.”
뫼는 느낌과는 다른 말을 꺼낸다. 느낌을 그대로 꺼내려니 마음이 아리고 서글프다. 그걸 털어내고 싶다.
“허긴? 모두가 행복이 없는 웃음은 아니었어? 정말 가슴 깊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웃고 있었어? 봐! 아줌마도 놈들과는 다르잖아. 놈들을 좋게 생각지 않잖아.”
들도 뫼의 말을 붙든다. 그녀도 세상이 셋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끌려간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