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가 비아냥거린다. 누리가 드라마 속 인물의 대사를 따라 말하는 게 영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다.
“아니야. 우리도 다르지 않아. 우리도 작품 속 등장인물의 삶을 살고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사이버공간이고. 다른 게 있다면 우리에겐 짜인 각본이 없다는 거야. 저들 편에서 보면 것도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현실이 없어”
들이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말한다. 드라마를 볼 땐 생각지 못한 아픔이 속을 꽉 채우고 있다. 씁쓰름하다. 씹을수록 쓴맛이 더 느껴진다. 들의 말에 다들 전염된 듯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신다. 입을 꾹 다물고 들의 말을 곱씹는다. 현실이 없다는 말이 거세게 밀려온다. 가슴이 먹먹하다.
“그건 아냐. 우리에게도 현실이 있어.”
뫼가 잠자코 있다가 끼어든다.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뫼를 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이다. 사이버공간에 무슨 현실? 말도 안 돼, 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뫼는 고개를 젓는다. 사이버공간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에게는 현실이 있다.
“니들은 믿지 않지만 내 생각은 달라. 이곳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야. 비록 사람의 머리에서 태어난 가공된 생명체이고, 여기가 가공된 공간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어. 현실이 없는 건 우리가 아니라 드라마야. 거긴 허구만 가득해. 현실은 허구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2013년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드라마처럼 살지 않는댔어. 거기도 현실은 희로애락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했어. 아줌마 말이 신은 인간이 온갖 잡다한 기분을 맛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했어. 누구도 그 맛을 안 보고 비켜갈 수 없다 했어. 사람이 모두가 같지 않은 것은 바로 그거야. 니들과 나도 다르잖아. 우린 늘 새로운 순간을 만나. 그때마다 우린 그 순간을 우리의 구미에 맞게 요리해. 그렇게 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거야. 그게 삶이야. 아줌마도 비슷한 말을 했어. 하지만 드라마엔 그게 없어. 배우들이 정해진 각본대로만 살아. 정해진 각본대로 살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은 현실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야. 그뿐이 아니야. 허구지만 아주 그럴듯해. 현실보다도 더 그럴듯하다고. 사람들의 꿈을 한없이 자극해대고 있으니까. 그게 현실이 아님에도 현실처럼 느끼게 만드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빠져들고 마는 거야. 만약,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복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아무도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처럼 빠져들지 않아. 심드렁하니 짜증을 낼지도 모르지. 그러니 우리에겐 현실이 없는 게 아니야. 우린 각본 없이 살아내고 있잖아.”
뫼가 간절한 눈빛을 담아 토해내듯 말한다.
“무슨 말? 우린 아줌마의 글과 함께 탄생했어. 아줌마가 쓰고 있는 대로는 아니지만 뼈대는 아줌마의 상상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 헌데 각본대로가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아미가 톡 쏘아붙인다.
“이번엔 아미 말이 맞는 거 같다. 우린 아줌마의 상상으로 태어났고, 그 상상에 따라 살고 있어. 헌데 각본이 없긴?”
이든이 뫼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투로 아미를 거들고 나선다. 뫼는 당황하지 않는다.
“아니야. 우리의 삶이 아줌마의 상상과 많이 다르다고 했어. 게다가 이제 더는 우리의 삶을 상상하지 않겠다고 했어. 우리끼리 알아서 살라 했어. 그러니 이젠 아니야. 시작은 그랬을지라도 지금은 아니야. 우리 힘으로 살아내고 있다고.”
“그래? 그럼 앞으론 좋은 일만 있겠네?”
버들이 반색을 한다.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퍼진다.
“아니? 좋은 일만 있는 삶은 없어. 게다가 누군가의 간섭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모두 다 좋은 것만은 아니야. 책임을 져야 하니까.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니까. 지금 당장 우린 우릴 만들어낸 놈들과 맞서야 돼. 아줌마의 상상에 따라 산다면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어떻게 되겠지. 한데 지금은 아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우릴 내려놓는 순간, 우린 놈들의 돈줄로 떨어지는 신세가 될 거야. 그게 싫으면 맞서 싸워야 돼! 그리고 지켜내야 돼! 아줌마가 끼어든다면 그건 도와주는 것일 뿐이야. 아줌마는 우리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되어 대신 싸워줄 수는 없어!”
뫼가 길게 현실을 입에 올린다. 말이 입에서 술술 새어나온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뫼의 말이 그럴 듯하다. 그리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놈들이 멈춘다면?”
“그럴 일은 없어. 놈들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어. 우리의 삶이 돈벌이가 되었던 것은 2013년의 현실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걸 몰라. 놈들만 알고 있어. 그래서 현실과 다르면서도 우리의 삶이 너무 실감이 났던 거야. 그게 사람들을 사로잡았어. 더 볼 수 없게 되자 항의가 빗발칠 정도로. 여전히 돈벌이가 된다는 뜻이야. 그러니 놈들은 절대 멈추지 않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좁혀올 거야. 우린 달아날 곳이 없어. 맞서 싸우는 것밖에는 선택이 없다고.”
잠깐 꿈틀하려던 모두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가슴이 먹먹하다. 기가 막힌데 분풀이할 상대도 앞에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어. 우리의 현실이 막막하긴 하지만 앞이 없는 건 아니니까. 받아들이고 싸워서 이기면 되니까. 그게 삶이니까.”
뫼의 말에 누리가 고개를 수그린다. 고개를 수그린 채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을 떠올린다. 현실의 사람들처럼 웃고, 울고, 다투고, 말하고 한다. 현실에서처럼 어색함이 없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행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각본이 없다는데 웃을 수도 없다. 뫼의 말이 너무 아프게 찌르고 들어온다. 짜인 각본대로 웃고 울고 할 땐 오히려 편히 웃을 수 있었다. 그게 각본인 줄 몰랐을 땐 마음에서 거리낌 없이 웃음을 퍼낼 수 있었다. 각자의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데 누군가의 각본에 따라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턴 모든 게 가볍지가 않았다. 빠져들다가도 뒤돌아보곤 했다. 곱씹어 보기도 했다. 그 자리엔 언제나 아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지금까지 누군가의 재미거리가 되고 있었다 한다. 생각만 해도 뼛속에서부터 아픔이 올라온다. 더는 각본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게 반갑긴 하다. 하지만 잘라내야 하는 대상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그쪽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란다.
고개를 들고 뫼를 본다. 같은 또래지만 든든하고 듬직하다. 늘 상황과 맞서는 걸 피하지 않는다. 그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난 니 말을 믿어. 게다가 난 우리가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되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살아가는 건 싫어! 생각해 봤는데 그건 너무 서글퍼. 놈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어. 내 현실을 받아들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