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친다. 들이다. 누리도 보인다. 이어서 버들도 이든도, 아미도 들어온다. 다들 낯선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왜 그래?”
들이 걱정스레 묻는다. 하지만 그의 귀에서는 앵앵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누리가 뫼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댄다. 하지만 뫼는 힘없이 흔들릴 뿐이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왜 그래?”
다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살핀다.
“왜 그래?”
놀라서 힘이 빠진 목소리가 또 들려온다.
“정신 차려! 무슨 일이야?”
반응이 없자 목소리가 올라간다. 그래도 뫼의 눈은 꿈쩍을 안 한다. 들이 뫼에게서 이든을 밀어내고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리곤 두 손으로 뫼의 팔을 잡는다.
“무슨 일 있었던 거지? 여자라도 만났어?” 들이 그냥 해본 소리에 뫼가 걸려든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들의 시선이 깊숙이 파고 들어온다. 한데 밀어낼 수가 없다. 눈동자가 더 흔들릴 뿐이다.
“여자가 우릴 어떻게 하겠데?”
뫼의 얼 띤 표정에 들이 달래 듯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그의 안을 건너짚는다.
뫼가 약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여자가 나 몰라라 해?”
들의 목소리가 어루만지듯 부드럽다. 차츰 그 목소리에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무슨 말이야?”
누리가 답답함을 털어내지 못하고 끝내 소리를 높인다. 들이 그런 누리를 올려다본다. 누리는 들의 눈길에 고개를 돌린다. 들의 눈빛이 다가오자 괜히 미안하다. 어정쩡하게 물러난다. 들은 다시 뫼에게로 눈길을 옮긴다.
“여잘 마주친 건 맞는 거지?”
들은 뫼의 눈에서 누그러지지 않고 남아있는 불안감을 읽는다. 뫼가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도 읽어낸다. 달래 듯 어루만지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시선은 뫼의 눈 주변에 머물러 있다.
“여자가 아니었어.”
뫼는 들의 눈빛을 막아낼 수가 없다. 빠져나갈 수도 없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생각을 내던진다. 그리고 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불안감이 잦아들면서 후하고 숨을 길게 내쉰다.
“여잔 우리 존재도 모르고 있었어.”
“그러니까 니 말은, 우릴 이곳에 보낸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는 거지?”
들은 뫼의 말뜻을 바로 알아챈다. 가능성을 생각해봐서인지 놀랍지도 않다. 외려 차분해진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나봐. 아마도 여자이기를 바랐나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은 원치 않았나봐. 혼란스럽고 막막한 걸 보면.”
머릿속을 온통 뿌옇게 채우고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럼 우리가 여자의 상상 속에 갇힌 게 아니라는 거네?”
“확실한 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자의 반응으로 봐선 그런 거 같아.”
“그럼,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야?”
누리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둘의 대화가 주춤한다.
“만약 여자가 아니라면, 3013년의 과학자들? 그들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거지? 그러기로 했으니까. 한데 그들은 또 어떻게 찾아내지? 가슴은 또 왜 이렇게 썰렁한 거야?”
이든이 누리의 물음에 뫼 대신 말한다. 한데 그의 말이 덤덤하지가 않다. 마치 제 살점을 씹고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버들과 아미는 잠자코 있다. 눈빛은 뫼에게 머물러 있다.
“여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이제 우린 어쩌지?”
버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처럼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한다. 확실한 대상을 모르고 헤맬 때보다도 더 가슴이 쓰리다.
“어쩌긴? 누군지 모르지만 우릴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찾아내 아작을 내줘야지.”
누리가 이를 앙다물며 말을 뱉어낸다. 입에서 말이 씹혀 바스러져 나오는 듯하다.
“다음 순서는 3013년의 과학자들이야.”
들은 누리를 쳐다본다. 하지만 눈길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가슴이 시리다 못해 꽁꽁 얼어 버릴 것만 같다. 얼른 여자를 제치고 3013년의 과학자들을 주워든다.
“아니야. 그들은 존재하지 않아. 여자가 그랬어. 2013년이 지나가지도 않았다고. 우리가 화면에서 본 자료들도 2013년까지의 것들이 거의 다야. 2014년 것도 마찬가지야. 그건 여자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뜻이야.”
뫼의 가늘게 뜬 눈이 꿈틀거린다. 여자의 말을 차근차근 되새겨간다.
“그럼 화면에서 본 자료는?”
“그건 누군가의 또 다른 작품이겠지.”
목소리에 물기가 없다. 버석버석하다.
“누구?”
“2013년의 두뇌파들.”
“모래밭에서 머리카락 줍기야. 너무 막막해.”
들이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겨우 입을 달싹여 말한다. 뫼의 가슴이 다시 먹먹해진다. 들의 목소리가 명치끝에 얹힌 채 빠져나가지를 않는다. 주먹을 불끈 쥔다.
“막막해.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아. 그래도 어딘가에 길은 있을 거야. 가상세계를 죄 더듬어서라도 꼭 찾아내고야 말 거야.”
악문 이가 서로 어긋나면서 쁘드득 소리가 난다. 꽉 쥔 주먹에도 힘이 더해진다. 눈앞은 깜깜하지만 마음은 결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속은 바작바작 타들어간다. 결기만으론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속을 식힐 수가 없다.
“여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럴 수 있을까?”
들이 혹시나 하는 바람을 얹어 말한다. 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놀람을 감추지도 못하고 급히 빠져나갔던 여자다. 그녀가 앓는 소리로 토해냈던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여자에게 물어볼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새도 없었다. 여자가 하도 서두르는 바람에 미쳐 거기까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애니메이션이 뭔지 궁금하다. 여자를 놀람으로 몰아넣은 걸로도 부족해 급히 빠져나가게 했던 그 말이 뭔지 알고 싶다. 그것까진 털어놓을 수가 없다. 마음이 꺼린다. 화면을 뒤져볼 수도 없다. 다들 맥을 놓고 숨만 달랑달랑 내쉬고 있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