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는 이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들려오는 소리에 흐느낌이 묻어 있다는 걸 느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 끼어들었을 거라는 이선의 말은 온전하게 들어와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뫼가 이선의 말에 3013년의 과학자들을 떠올리며 말한다. 이선은 뫼의 말 따위는 아랑곳없는지 대꾸가 없다.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뫼는 이선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뜻인가요?”
뫼가 이선의 혼잣말을 참지 못하고 끼어든다.
이선은 가슴이 먹먹해온다. 눈빛이 마구 흔들린다. 얼굴도 온통 일그러진다. 견딜 수가 없다. 가슴이 조여 오는 듯이 아프다. 머릿속도 찢겨 나뒹구는 종잇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 도통 짜 맞출 수가 없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주저앉고 싶은 걸 겨우 참는다.
일단은 빠져나가고 싶다. 빠져나간 후 곰곰 생각을 해봐야 할 거 같다. 화면을 닫으려 마우스를 손에 쥔다.
갑자기 뫼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이선이 빠져나가면 끝장이라 생각한다. 이선의 놀람으로 미루어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을 거 같다.
“빠져나가지 말아요! 그럼 우린 모두 마법에 걸린 것처럼 멈춰버려요. 우릴 그렇게 팽개치지 말아줘요!”
뫼가 다급하게 외친다. 이선이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잠시 화면을 본다. 하지만 더 이상 입은 열리지 않는다. 손도 자판에서 벗어나 있는 채다.
“작품을 쓰는 창이라도 열어둬 주세요.”
뫼가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부탁한다. 그의 눈빛이 간절하게 화면에 가서 머물러 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먹먹하게 조여 오는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심장도 마구잡이로 뛰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문명의 발달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녀도 그걸 누리고 살고 있다. 30년 전으로 돌아가라 하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허락하는 선은 있다. 인간의 생명이나 유전자 분야가 대상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것만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분야만큼은 문명이 끼어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유전자 조작도, 유전자 복제도, 감정을 가진 인조인간도, 모두 바람직한 인류의 미래와는 거리가 있다. 한데 애니메이션 인간이라니. 애니민이라니.
이선은 침대로 가서 힘없이 쓰러진다. 그녀의 눈이 초점을 잃고 헤맨다. 몸은 드러누운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냥 허무감을 달래기 위해 만 년의 지구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채워나갔다. 7987년 동안 잠을 잔 여섯 명이 잠에서 깨어나고,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더듬어 살아내게 할 생각이었다. 애니민 같은 건 처음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한데 자신도 모르는 작품속 등장인물들이 생명체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 숨을 쉬고, 끼니때마다 먹을 걸 먹고,······. 생각만 해도 오싹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더 소름이 돋는 건 그들의 운명이다. 그녀는 어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내버려 두자니 가슴이 먹먹하고, 그렇다고 나서자니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 그래도 이대로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선다. 뫼의 다급하게 불러 세우던 눈빛을 본 것도 아닌데 그게 환영처럼 나타나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뫼.’
그녀는 나지막하게 뫼를 불러본다.
갑자기 뫼의 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여자가 빠져나간 화면은 둘이 주고받은 말들로 빼곡하다. 화면을 보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가슴은 여자만큼이나 먹먹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바람만이 사납게 불어댄다. 몸에서도 힘이 죄 빠져나간다. 서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자의 놀란 목소리만이 머릿속에서 홀로 맴돌고 있다. 그녀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빠져나갔다. 가녀리게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말하고자 했던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달아나던 태도로 보아 다시 돌아올 거 같지가 않다.
뭐가 잘못된 걸까? 우린 어찌 되는 걸까? 우리는 또 다시 어디를 떠돌아야 할까? 여자가 창을 닫아버리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다. 한데 도움을 청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자도 빠져나가고 없다. 혼자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가림막도 없이 홀로 던져진 기분만 밀려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더 이상 여자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줄어든 건 하나도 없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오히려 여자라는 확실한 대상이 사라지면서 대상을 찾아내는 일이 하나 더 더해졌다. 일거리가 새로 생긴 셈이다. 그래도 2013년에 가 닿을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또 다시 생각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마운 게 또 있다. 여자는 여섯이 살아내고 있는 삶이 자신의 상상과 다르다고 했다. 여자의 상상을 터전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몫이 더해졌다는 뜻이다. 그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아니 아주 큰 수확이다. 어쩜 그걸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뫼는 다른 것들도 떠올려본다. 여자도 그 자신도 7987년의 거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벽을 사이에 두고 한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7987년 동안 잠을 자서 자신들은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여자는 느껴야 한다. 한데 여자가 더 낯선 듯이 말한다. 그리고 여자는 2013년을 살고 있다고 했다. 여자 쪽에서 보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7987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데 자신 쪽에서 보면 7987년의 긴 시간이 흘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다시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단추를 눌러 다른 화면을 불러온다. 여자가 살고 있는 2013년의 화면이다. 만 년에 불러온 컴퓨터의 첫 화면은 2천 년대가 도배를 하고 있다. 그것도 2013년까지의 화면이 거의 대부분이다. 다른 시기는 가뭄에 콩 나듯 보인다. 초기화면에서 복잡하게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해야 비로소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온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왜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알아내야 할 일이다. 알아내야 할 게 산더미다. 한데 찾아 나설수록 덜어지는 게 아니라 더해지기만 한다.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다. 여자에 대해 알게 됐다는 거 하나만 빼면 처음 있던 자리에서 미로 속으로 한참을 걸어온 느낌이다. 가도 가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길이 너무 많아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들어가 볼 뿐이다. 막막하다. 그래도 주저앉을 마음은 없다.
말을 해야 할까? 그것도 가늠할 수가 없다. 말을 해야 한다면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그것도 선을 그을 수가 없다. 모든 게 아리송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한다. 온갖 것들이 순서 없이 물밀 듯 들어온 탓이다. 어지럽다. 화면 앞에 멍한 채 앉아 있다. 일어날 수도, 화면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가늠도 안 되고, 선도 그을 수 없고, 추려낼 수도 없는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머릿속을 두드려댄다. 그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