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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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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일


BY 한이안 2015-04-04

20131월 첫째 날. 일어나보니 눈이 잔뜩 내려 있다. 온 땅이 눈으로 가득 덮여 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집을 나선다. 시에서 운영하는 체력단련실로 가고 있다.

아파트 중앙현관을 나서자 눈이 밟힌다. 눈은 발목까지 덮는다. 반야 산도 다르지 않다.

반야 산 산책로로 들어선다. 눈 덮인 길을 따라 아침 운동을 다녀온 사람들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발자국을 피해 아무도 밟지 않는 눈만을 골라 걸음을 옮긴다. 서설이라 생각돼서인지 그래야만 한 해 동안 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는 조심조심한다. 눈길에 행여 미끄러지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 순간 기분이 묘해진다.

천 년 전, 아니 이천 년 전에 길을 걸어갔을 누군가를 생각한다. 난 나보다 앞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걸었을 길을 201311일에 걸어가고 있다. 그게 영 낯설다.

2013년을 현재로 느끼며 살고 있는 현대인이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아니, 죽음이 내게서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내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오고 있는 기분이다. 난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른다. 반야 산을 걷고 있는 내내 그 생각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내가 죽고 나서도 사람들은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쌓여 만 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는 이 길을 걸어갈지 모른다. 그 사람에게 난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인간이 되어 백골로 떠오를 것이다. 내가 아주 어릴 적 보았던, 농수로공사를 하면서 파헤쳐진 흙더미에서 뒹굴었던 해골처럼. 숨결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휑하니 움푹 들어간 웅덩이를 가진 둥그스레한 뼈다귀처럼. 머릿속에선 말을 타고 달리게 만들어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함만 주변에 맴도는 존재들로. 칼을 들고 달려와 찌르고 찔려도 아프지 않는 무감각함으로. 그냥 생각하면 쓸쓸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과거, 과거의 사람은 내게 그런 의미로밖에 다가오지 않으니까.

먼 훗날을 살아서 이 길을 걸어갈 그들도 지금 내가 과거의 누군가를 느끼듯이 나를 느낄까? 나처럼 낯선 느낌으로 나를, 아니 나와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까? 그렇게라도 먼 과거에 이 길을 걸어간 누군가를 막연히 떠올려줄까?

생각은 거기까지 가서 머문다. 머문 그 자리에 무상감이 고여 든다. 덧없음도 끼어든다. 마치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살아있음이 의미를 잃고 만다. 그래도 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낯선 느낌도 가시지 않는다. 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으며 그 느낌을 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한 번 다가온 생각들은 밀려나지 않는다. 그렇게 체력단련실에 다다른다.

체력단련실에서 난 두어 시간 가까이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걸어서 돌아오는 동안도 그 낯선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다. 내가 마치 만 년 후의 사람이 되어 걷고 있는 느낌까지 끼어든다.

그래도 지금은 2013년이다. 올해는 유난히 추울 거란다. 차가운 대륙고기압이 한반도에 영향을 많이 미칠 거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 탓이란다.

환경이 파괴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의 보복이다. 그 보복이 점점 거세질 거라는 말도 나온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30년 후는 어찌 될까?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80대일 텐데, 난 그 거친 자연의 보복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 이천 년 후는 또 어찌 될까? 그때도 지금 내가 걸어간 이 산이 이대로 남아있을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자신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난 견뎌낼 거다. 내 아버지의 강인한 정신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으니까.

한데 이상하다. 아버지의 강인한 정신력을 이어받았으니 견뎌내기야 하겠지. 하지만 불안함을 걷어낼 수가 없다. 30년을 내다보는데 눈앞이 캄캄하다. 휙휙 달라지는 세상은 겪어보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2013년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진작 버려서 구석기 물건 보듯 하는 핸드폰을 난 지금도 쓰고 있다. 늘 새롭게 출시되는 스마트폰과 아이폰, 그것들은 내게 이방인 같은 물건들이다.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내가 다가가지 않으니까 그들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달라지는 세상은 감지가 된다. 가까이 하진 않아도 문명의 산물들이 나를 꽁꽁 에워싸며 좁혀오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의 보복보다도 그게 더 무섭다. 밀어낼 수 있다면 힘껏 밀어내고 싶다.

하지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난 언제 저승사자에게 끌려갈지 알 수 없는 몸이다. 남들은 아직 생각하지 않을 죽음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살아내고 있는 나다. 그래도 난 한 40년은 더 살고 싶다. 간절하게 난 40년을 붙잡는다. 그래서 하루도 멈추지 못하고 체력단련실을 다녀오고 있다. 그래야만 그 절반이래도 살아낼 거 같다.

20년 후를 생각해도 캄캄함은 조금도 엷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난 그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 보기로 한다. 수렁인지 반석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발을 들이미는데 두려움이 다가온다. 그래도 호기심은 발을 빼내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엉뚱한 생각이 끼어들어온다. 난 현재를 내려놓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