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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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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번지..


BY 시나브로 2004-01-08

J시는 온통 하얀 눈 천지다

낡은 역사 건물은 푸른 새벽 시간에 하얀  궁전으로 변했다

사내가 아는 J시를 순간 낮설게 한다

역무원의 졸린 하품이 굴뚝의 하얀 연기를 만들어 내며 사내에게 짧은 목례를 한다

사내는 애써 외면하며 공중 전화의 부스를 힐끗 처다보다.잠깐 망설인다

하지만 군용빽을 들처멘 어깨에 힘을 주고 역광장을 빠져 나간다

매달 어김없이 들르는 J시는 별반 달라 진게 없다

기름과 먼지로 희미하던 "역전다방"간판이 밝고 노란 색 "황제 다방"으로 바뀌어 있을뿐..

늘 보던 건물과 길 거리는 사내의 눈에 익어 눈 감고도 걸어 가겠지만 하얗게 뒤집어쓴 눈 탓인지 J시는 오늘 수줍음 많은 새색시 모습같다

녀석의 집에 가려면 역전에서 20 여분 걸어가야 한다

늙은 거북이처럼 체인 감은 새벽 버스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지만 사낸 버스엔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사내의 발 끝에 찍힌 인도 보도 블럭에 밟히는 눈 소리가 뽀드득 유리알 소리같다.  사내는 그저 고개만 숙인체 두꺼운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눈 속에 찍히는 낡은 워커화의 발자욱만 바라보며 걷는다.

이제 신시장을 지났으니 전화국을 가로질러 문화회관을 비켜나고 우체국 붉은바탕에 흰 제비가 박힌 간판을 돌아  J시에서 제일 비싸다는 삼화 아파트의 단지 끝 자락에 있는 집이 녀석의 집이다.  녀석의 집은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낡은 단독주택이다.

시멘트 냄새가 가시지 않은 다세대 주택과 고층 아파트 사이에 비집고 끼어있는 녀석의 400번지는 밤에 비치는 희미한 불빛만 없다면 영락없는 빈 페허같다

거기에 녀석은 다 떨어진 누렇게 변색한 장판위에 누워 있을 것이다

행상을 하고 밤늦게 오는 늙은 노모의 조바심따윈 아랑곳 없이 종일 괴괴하게 흐르던 400번지의 공기를 독한 욕설과 한탄으로 늙은 노모에게 한바탕 헤댈을 것이고...늙은 노모는구부러진 새우 허리를 뿌드득 소리나게 세우며 세간 이랄 것도 없는 부억에 들어가 바쁜 저녁 준비를 햇으리라. 빈 집에 식물인간이 되어 젋디 젋은 청춘을 방바닥에 내맡긴체 누워 있었을 녀석의 마음을 헤아려 죄지운 죄수처럼 허물뿐인 육신에 대못을 박았겠지...

어디선가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폐인트가 다 벗겨진 녹슨 양철 대문이 눈에 익은 녀석의 집이다

사낸 망설임이 없이 대문을 밀치고 하얀 솜이불 같은 마당안에 워커화의 선명한 발자욱을 눈밭에 찍으며 푹 꺼진 마루에 주저 앉는다.

녀석의 신발이 언제나 그러듯 먼지를 뒤집어 쓴체 마루끝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한때..아득히 먼 옛날에 녀석은 저 신발을 신고 사내를 만나러 온적이 있었다

부드러운 밤색 쎄무가죽 힐은 녀석의 여린 몸의 일부분처럼 착 달라 붙어 있었다

힐 끝에 박혀있던 은색의 금속 징...나비 모양의 가죽 끈.. 만이 녀석의 옛 시절을 간직하고 마루끝 구석진 곳에..그 자리에 있다.

사내는 가만히 녀석의 신발을 어루만진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겨우 신발 모양의 형체만 지니고 있는 녀석의 신발에 사내는 가만 가만 군용 쌕의 지퍼를 열어 구겨진 노란 봉투를 뻐내 신발안에 구겨 넣는다

한달 동안의 녀석의 생활비와 병원비다

사내는 깊은 숨을 몰아쉬고 컹컹 짖는 개소릴 뒤로 하며 빠른 잰 걸음을 걷는다

영등포에 도착하려면 J역전 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사내의 바쁜 잰 걸음 뒤로 늙은 은행 나무 가지끝에 걸린 눈꽃이 우우우 바람소릴 내며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