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다는 듯 그동안의 일을, 은숙은 털어놓았다.
죽은 듯 듣기만 하는 진수...
은숙의 얘기가 끝나도 진수는 말이 없었다.
둘은 말없이 그렇게 바다를 쳐다만 보았다.
솔직히 은숙은 불안했다.
그런 모습의 진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은숙은 진수를 다시 쳐다보았다.
지금은 어떤가...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지한 모습이지 않는가...
[아휴...글잖아도 재란인 니가 알까봐 걱정했다 아이가. 그라고 조만간 얘길 해야지. 하고 있던데...일이 이렇게 됐네]
[... ...]
[내 생각인데...지금은 니가 그냥 모른척 해주믄 안되겠나?]
[... ...]
[아이 씨, 그 여자는 와 지금 나타나가 지랄이고]
[[... ...]
그러나 여전히 침묵만 지키는 진수가 은숙은 점점 더 불안했다.
[야! 말 좀 해봐라!]
[믄 말?...믄 말을 하란 말이고!]
[아구, 깜짝이야!]
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짤까? 미친년이라고 재란일 붙잡고 욕이라도 퍼불까? 아니믄, 나이깝 하라고 삼촌 면상에 주먹을 날릴까? 은게 좋겠노? 응?]
은숙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분노하는 진수를 또한 본 적이 없었다.
[그라이 말 시키지 마라...]
*
새벽 일찍 재란은 성인봉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게 구름위에 올라와 있는 기분이었다.
찾는 이 아무도 없었다.
세상을 베고 누운 기분이었다.
[청승맞게스리...잘하는 짓이다. 니 지금 하는 짓이 어떤 지 아나?...나 실연당했수!. 하고 광고 하는 것 같다. 알기나 아나?]
보건소 창가에 서서 재란은 은숙의 말에 그냥 웃었다.
[웃어? 그래, 니 이 말 듣고도 웃음이 나오자 보자...워크맨하고 니 사이, 진수가 다 알았다]
재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나한테 뭐라 하지마라. 니하고 내가 얘기하는 거 다 들었댄다. 가 생각보다 충격이 큰가 보더라. 채가 그런 모습, 처음봤다 아이가. 니 보자고 할지도 모르이 마음 단단히 무라]
[참...온 동네에 소문이 안 퍼지기만 바래야겠다]
농담처럼, 재란은 씁쓸하게 내뱉으며 보건소를 나섰다.
[산 넘어 산이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은숙이 한 마디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는 재란을 재당,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았다.
[아이, 할멈 손녀 아이오?]
할머니만 아니다. 할아버지 한 분도 같이 본 것이다.
[늘상 씩씩한 아인데 와 저리 힘이 없나?...믄 일 있소?]
할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자를 보믄 꼭..할멈 소실적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늘 좋소. 별채에 다소곳이 앉아 수를 놓던 할멈말이오...참말로 이뻣소. 상놈주제에 감히 아씨를 훔쳐 본다고 어무이한테 얼매나 매를 맞았던지...]
[이미 양반임네, 상놈임네 하는 세상이 아니었지요. 우리집만 유별난탓에...]
까마득한 옛 일을 떠올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에 아련한 추억의 미소가 어렸다.
[그 놈의 제도만 아니었다면...할멈은 내게로 왔을까 싶소?]
할아버지의 물음에 할머니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 걸로 답은 되었다.
[우리 사이가 들통난 바람에 할멈이 그 해 바로 혼례를 치뤘을 땐 참...세상 살 맛이 안 났소]
[그래서 바로 장가를 가신게요?]
할아버지는 허허...하며 웃음으로 대신했다.
[영감님...집에 온 색시랑 막내 아들, 혼례를 치뤄 줄 겝니까?]
[할멈도 봤소?...집에 꺼정 찾아온 정성은 갸륵타만은..속내를 털어놓자믄 영...내키지가 않소. 여자란 자고로 눈속에 그윽한 따스함이란 게 있어야 하거늘 그 샥시는...]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겄소. 자슥 이기는 부모 없다 했습니다. 영이 마음따라 가야지요]
[그게 문제요. 영이 놈, 마음에 새겨둔 여자가 있다고 야그 한 적이 잇소. 난 그 샥신줄 알았는데...아닌 것 같다 말이오. 영이 그 샥시를 보는 눈이, 여자를 보는 눈이 아이라 이 말이지]
[그럼...딴 색시가 있단 말이오?]
[모르지. 진짜 있어서 하는 소린지...귀찮아서 그냥 해 본 소린지... 쯧...여태껏 말썽 한 번 없이 자란 놈인데...장가 문제로 속을 썩이네...내 욕심일진 몰라도 재란이가 막내 며느리로 온다믄 더 여한이 없겠소 만은...]
[나도 그렇네요. 우리 손녀 신랑감으론 영이가 딱인데 말이오]
*
[나 ...여기 일 정리하고 대구로 갈까?]
[... ...!]
은숙은 재란이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말속에 조금은...여운이 있지만 표정은 심각했다.
[꽁무니를 빼겠다고? 그라믄...영이 오빠가 니 쫓아 갈까봐?]
[...그럼...더 좋고...]
그녀는 웃었다. 넉살좋게...기가차다는 듯 은숙은 혀를 찼다.
[니 지금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진짜로 하는 소리가?]
대답이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재란의...
[...진수네....]
진수는 냇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그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니들은 죽을 때도 붙어 있을래?]
같이 나타난 은숙을 보며 퉁명스레 뱉었다.
[그럼 좋지 뭐... 야, 얘기 하고 있어라. 내가 술 사올께. 아침까지 마셔 보자]
두 사람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은숙이 잠시 자리를 떴다.
[...미안하다]
먼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바보같제? 많이 놀랐나?...그 놈이...삼촌이라서...]
[니는 지금 농담이 나오나 ?...가시나...앉아라]
둘은 자갈밭에 퍼질러 앉았다.
냇물 흐르는 소리와 파도 치는 소리가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진수야, 동정은 하지 마라. 니는 어떤지 모르지만 난...상처받은 것도 없고...영이 오빨 원망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일방적인 사랑을 한 건 나니깐...]
[와 하필...삼촌이고...]
[훗... 부탁하나 하자...삼촌한테 아무 소리 하지 말아줘. 니가 아는 걸로 끝내줬음 하는데?...들어줄거제?]
[그런 부탁 하지 마라...내 맘이다.... 니를 한 방 치는 것보다 삼촌 한 방 치는 게 더 안 낫나]
[그러지마라. 니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절대 그런 짓 하면 안된다]
[...어디가 좋던데?...삼촌 어떤 면이 좋더노?]
[... ...!]
[그래 좋으믄 죽이되든 밥이되든 함 덤벼봐야 안되나. 그 여자댐에 자신이 없나? 그런 거 겁낼 이 재란이가? 그 여자는 대놓고 삼촌 꼬시는데 니는 와 몬하노?]
[...이게...내 사랑 방식이니깐]
[... ...!]
[다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을 하는 건 아니잖아...그라구...난 오빠를 존중해 주고 싶다. 오빠 결정을 따르고 싶다. 그러니...진수 니도 그냥 지켜봐주면 고맙겠는데...]
[뭘? 삼촌이 그 여자한테 가는 거? 그래서 니가 상처 받는 거? 니도 바보다. 여자는 믿을 게 못 된다고 하지만 남자도 똑같다. 자신의 야망을 펼칠 기회가 눈 앞에 있는데, 그 기회를 여자가 쟁반에 올려 갖다 바치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싫다고 하겠냐? 소라씬, 삼촌과 같이가 아니면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아이가. 알고나 있냐?]
가슴이 즈끈 거렸다. 그러나 재란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