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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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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란 은행나무 밑에서..(추적추적 내리는 빗물...두번째)


BY 황소 2003-06-20

"엄마 어디갔어?"

밀폐된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달뱅이처럼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는 내 어깨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써늘한 바람과 함께 묻어온다. 막내다. 개구쟁이 막내.짖궂은 사내아이.시커멓게 입주변에 먹칠을 했는지.아무튼 얼굴이 온통 새카맣다. 세수비누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을 것같은 더러움. 온화하고 따뜻한 빈자리가 금새 들통낳는지 다 헐거워진 창호지문을 펄럭이며 금새 묻는다. 뭐라고 대답할까? 장에 갔다고 할까?아님 웃동네에...

아냐, 금새 거짓말이 들통나는데.. 대꾸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낳다 싶다. 아까 엄마처럼..

막내는 허리가 큰 엉성한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문턱이 자신의 무릎보다 높은 방안에 성큼 들어선다. 키가 작다. 제 아버지를 닮아서... 얼굴을 무척이나 귀엽고 동그랗게 뜬 눈이 특히 놀라거나 그럴 때면 더욱더 커지는 검은 눈동자가 꼭 소를 떠올리게 한다. 순박한 소.일만 아는 소..누우런 소가 음매. 하며 울부짖을 때처럼,

"...."

"어디갔냐고?..."

고음이다. 대꾸가 없자  성을 버럭내는 톤이다. 나는 쪼그리고 있던 어깨를 들어 부시시한 머리를 가다듬다 혐오하는 듯한 눈초리로 째려보았다. 꼭 아빠같이 화부터 내기는..

아까부터 자꾸 주눅들듯 몇시간 동안 거동도 하지 않은 채 있었던지 온몸이 쥐가 날 지경이다. 꿈이길 바랬다. 그저 엄마가 서둘러 피난가듯 짐을 싸서 택시를 타고 간 그 시간이 그저 한낱 잠시잠깐 꿈이길 바랬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꿈이 아니고 모든게 짧은 시간에 일어난 현실이다. 현실들. 산산조각처럼 파편처럼 흩어지는 현실들.

갑자기 눈물이 솟구친다. 현실이라는 것때문에. 금새 빈 허전한 빈자리가 또다시 밀려온다는 사실때문에.. 엄마는 자주 집을 비우곤 했다. 읍내에 식당에 일하러 나갈때 새로 생기는 운동화 공장에 취직때문에... 버스를 타고 산골까지 타고 오면 벌써 황혼녘이 지나서 컴컴한 칠흙같은 어둠이 한참 되어서 퇴근하고 했는데... 그리고 정이 떨어지고 자식에 대한 모정을차츰차츰 한올한올 접어둘 때부터...웬지 써늘한 서릿발같았다.입가에 맴도는 웃음까지도...

따라갈 걸.. 참 이상했다. 아까 외갓집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여느 때같으면 따라간다고 했을텐데  지금 생각하니 따라간다고 졸라대지 않았던 게 뼈아프게 후회같은게 밀려온다.

바보..바보..딱딱한 돌같은 머리를 쥐어박는다.

"누나, 배고파"

순진한 소처럼 커다란 눈망을 크게 뜨고 올려다본다. 너무 크다. 지금 생각해도 그 눈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눈이.. 우리 아들이 제 삼춘눈을 닮아서일까, 아들 나이가 그때 막내 또래였다. 매정하기도,서릿발같기도 하지... 발길이 떨어졌을까. 하나도 아닌 넷을 두고 배아파서 낳은 자식 넷을 두고 신발 뒷꿈치가 떨어졌을까?배고프다는 아이의 엄살같음에 나는 서둘러 일어서서 이미 환히 열려진 방문을 부러 더 밀어제치고 마루에 두 짝다 홀랑 뒤집어진 신발을 발가락으로 주춤주춤 찾아 끼워신었다.

부엌에 찬밥이 있었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라도 해놓고 가라고 말할 걸...

곰팡이 내 나는 부뚜막의 부지갱이는 축축함에.. 냄새가 역겹다. 눅눅하니 언제나 부엌은 눅눅한 내가 난다. 마당의 평지보다 움푹 파여서였을까.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꼭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인민군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컴컴하고 저녁에는 간신히 불켜는 곳을 더듬더듬 찾아 불을 킨다.어디 찬장에 먹다 남은 라면 반쪽있을 텐데.. 검은 솥뚜껑을 메마른 손으로 간신히 열어제친다. 찢어지는 신음이 날카롭게 들리며 이어 하얀 밥알이 몽글몽글 이미 식어버린 수증기가 이슬처럼 뚜껑 위에 맺힌 채  드러났다. 이미 식어버린 열기가 식어버린 찬밥이 시루떡처럼 사람 손이 가시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움푹 수저로 펐다. 떡처럼 한웅큼 잘려나온다. 대충 쟁반에다 신내가 풀풀 나는 김치에 밥을 떠서 마루에 가져다 놓는다.

"물 줘"

양반다리에 마루에 벌써 앉는다. 막내는 한참 밖에서 뛰어놀다와 목이 탔는지 하얀 밥을 보는 순간 물부터 찾는다. 나는 수돗물을 틀어 대접에 한가득 떠다가 막내의 그 때가 잔뜩 뭍은 입에 가져다 대었다.벌컥벌컥...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에구, 얼마나 목이 탔으면..

목을 축이고 막내는 수저에 제 입모다 더 큰 수저로 움푹 떠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다.

"저러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아랑곳하지 않고 막내는 더  큰게 입속으로 더 밀어넣는다. 김치 한가닥 더 크게...

"근데.. 엄마.어디갔지." 주위를 서너 번 두리번 거린다. 텃밭에도 저 오십미터 떨어진 변소에도 .. 철부지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컴컴한 주홍빛 저녁노을이 깊게 물들어 있었다.

그만큼 주홍빛 노을과 그리고 우느라고 벌겋게 충혈된 내 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엄마 외갓집 갔어, 열밤 자고 온대. 그러니까, 누나말 잘 들어"

다짐하듯, 강조하듯 나는 그렇게 허술함이 노출되지 않게 말한다.

"어"

막내는 놀라는 표정이다.

"왜?"

"큰엄마가 그랬는데.. 엄마 어디가면 빨리 와서 말하래"

아이는 모범생같이 또박또박 말한다.

또 어린 아이한테 세뇌시켰나보다. 무슨 첩자를 키우듯이. 나는 큰엄마가 날 싫어하듯이 미워하듯이 나도 어린마음에 반발심에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또 증오한다.

그 여우같은 행동이며, 생김새며, 엄마하고 정 반대다. 호리호리하니 키는 크고 늘 눈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그 모습 뒤에 감춰진 이면은 늘 이기적인 것들...

"언제 그랬는데.."

"아까 아침에 ... 구판장에서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그랬다. 내일은 두 개 사준대 은경이 누나꺼랑 내꺼랑..."

"...근데 은경이는 어디갔어?"

"오다가 고무줄놀이 한다고 윗동네에 갔어. 누나 나 밥 더 줘"

막내는 벌써 빈대접을 쑥 눈앞에 내밀며 허기를 채운 배를 쓰다듬는다.밥알이 입가에 두 알 정도 묻힌채 씨익 웃는다. 허기가 채워진 뒤라야 기분이 나는가 보다.

피식 나도 웃는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막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 그리고 눈감는 날까지 막내의 말에 따르자면 아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렇게 숨이 거두셨다고 한다.그래도 물밥 떠 줄 아들을 남기고 불혹이라는 나이 갓 넘긴 채 돌아가셨으니... 온몸이 불에 타 만신창이 되어서도 아들을 끝까지 보고 돌아가셨으니 원이 없으셨겠지...

"막내야, 큰엄마 말 믿지마, 너 엄마가 더 중요하지 큰엄마가 더 중요하지 않아, 아이스크림 엄마도 사줄 수 있어, 앞으로 큰집 가지마, 알았지."

"싫어 큰엄마가 잘해 준단 말야"

"그래도 가지마, "

나는 큰소리 못을 박듯 강조했다. 막내는 별 아랑곳하지 않고 더이상 대꾸하지 않는다. 자꾸 어린 아이에게 특히 막내에게 엄마의 동정을 살피고 물어보고 그랬다. 자꾸 동태를 보고 감시하고 행여나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갈까봐 다른 남자 만나서 훌쩍 떠날까봐 불안했던지 아님 엄마가 떠나고 난 뒤 그 줄줄이 소세지들을 자기 몫으로 감당하기 싫어서...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그 줄줄이 소세지들은 다 큰엄마의 몫으로 되돌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