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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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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BY 액슬로즈 2003-04-29


재민과의 인연에 대해 입을 열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일단 말을 꺼내자 그 다음은 쉬웠다.
어차피, 언젠가는 얘기를 해야 할 터였다.
시간이 지나고 혹시나 다른 사람의(그래봤자 재민 뿐이지만) 입을 통해 듣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싶어 경인은 일찌감치 속을 털어 놓았다.

진희와 선애는 선뜻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다, 입을 쩍 벌리더니 얼마 후 진희가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나즈막히....그리고 서서히 킥킥대더니 급기야 크게 소리내어 웃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선애도 기가 차다는 듯 따라 웃었다.
경인은 맥주를 마시며 두 사람이 진정될때를 기다렸다.

[나 이제서야 이해가 가! 경인이 너 처음 민성씨를 봤을 때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거든. 솔직히 그렇게 놀랄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너 계속 민성씨를 잡아 먹을 듯, 미심쩍은 듯, 마치 원수를 보듯 보고 있었기에 무슨 일인가 했었어. 혹시 질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좋은 생각도 했었어]

[그랬어? 난 김 민성씨가 강 재민씨라고 생각했거든. 기절하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놀랬어...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경인은 그 때를 떠올리며 고갤 저었다. 선애가 낄낄 거렸다.

[그런 와중에 또 한 명이 나타났으니!]

[경인이 너 그 때, 진짜 유령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

[내가 알고 있는 남자와 진희 니가 결혼하려는 남자가 동일인인줄 알았을 땐...! 얘, 생각도 하기 싫어]

[유 경인!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처음 만난 남자랑 섹스를 하냐? 겁나지도 않던? 질나쁜 남자였음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하니?]

선애가 기겁을 하며 펄쩍 뛰었다.
섹스. 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하여튼 넌, 가끔 보면 사람 간 떨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가게 하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생기더라. 그 사람 강 재민, 참 편안하게 다가왔어. 내가 무얼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냥 그렇게 다 받아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그런 분위기의 남자였어. 그리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거라 믿었던 사람이고...]

[그러니깐 사람일은 모른다고 하는 거야. 인연이 될려고 하니깐 다시 또 만나지잖아]

미소띈 얼굴로 진희가 말했다.

[그 사람이 그래서 경인이 너를 묘하게 진한 눈빛으로 바라봤구나]

[그래, 남자랑 자보니깐 어떻든?]

기습처럼 다가오는 선애의 장난기 서린 말에 경인은 맥주가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진희가 소리내어 웃었다. 역시 궁금해 하는 눈빛을 하고...
경인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얘기해. 나도 다 얘기해 줬잖아]

[말은 바로 해라? 우리가 묻기도 전에 선애 니가 다 까발려놓고선]

진희가 약올리 듯 선애의 옆구리를 툭. 쳤다.

[어쨌던 빨리 얘기해! 얼른!]

[맥주나 마셔!]

경인은 그 문제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묻어두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마저 말해 버리고 나면 경인 스스로 강 재민을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경인은 재민을 외면하고 싶었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선 재민을 넌지시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지만 경인은 그것을 무시했다.
재민에게 이미 모든걸 다 보여준 상태에서 다시 만나,
그리고 마주앉아 얘기하고 바라 본다는 게 상당히 껄끄럼했다.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선애의 계속적인 조름에도 경인은 입을 봉했다.



[진희야]

돌아 오는 길에 경인은 진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분명 선택은 니 몫이야. 하지만 결혼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해야 돼. 니가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불행한 건 두 말 할 것도 없고...]

[경인아...]

[너 자신을 포기하지 마. 뭐가 아쉬워서? 무엇이 부족해서? 가슴속에 김 민성이란 남자를 담을 자신이 없다면 결혼 포기해! 병원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자식 만큼이야 하겠니? 잘 생각해. 우린 니가 행복하길 원해. 알지?]

[......]

경인은 진희를 꼭 안으며 등을 쓸어 주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좀 더 일찍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사람이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누가 있는 것인가.
누가 있는 것인가......
**


진희는 민성을 만나기 위해 오후 다섯시쯤 학교를 빠져 나왔다. 강변 도로를 따라 운전을 하면서 진희는 경인의 말을 떠올렸다.
결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가 대해서도 의문이었다. 그녀 어머니 또한 사랑은 뜬구름 같은 것이라 하지 않았든가!
하지만 경인의 말은 진희를 고민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레스토랑에 들어 서자 말끔한 차림의 민성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에게 걸어가면서 진희는 속으로 웃었다.
확실히 사랑은 없다!
민성을 봤을 때 최소한 작은 설레임이나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떨까?...

민성을 가만히 건너다 보며 진희는 처음으로 궁금해 했다.
민성이 눈을 들어 진희를 빤히 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늘 그렇듯 민성은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머리칼 한 올 미끄러져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진희는 민성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상당히 오래도록 그를 관찰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소?...사람 얼굴 그렇게 빤히 보는 것도 결례라는 걸 모릅니까?]

깎듯하고 다소 냉소적인 음성...
진희는 민성의 가슴속에 과연 따스함이란 게 존재하는 지 한 번 열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