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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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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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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BY 정빈 2002-10-18

할머니는 나를 껴안고 한없이 흐느껴 우셨다. 나도 감정이 복받쳐 울고 말았다. 내 얼굴은 멍으로 얼룩이 져 있었고 제대로 앉을 수 없을 만치 온 몸이 아팠다. 테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 날 밤 할머니와 함께 꿇어앉아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 개월 동안 건국 청년 운동을 한답시고 한번도 교회를 나가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 날 이후 집에서 가까운 개척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숙부님의 옥고
해방된 지 일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건국은 요원한 체 정치 테러가 난무하였다. 몽양 선생은 극 좌우로부터의 표적 인물이었다. 날마다 쫓김을 당하던 몽양 선생이 우리 집에 와서 몇 일간 유하던 1946년 7월 17일 밤 사건이 생겼다. 저녁 무렵 편지를 붙이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간 선생이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다. 선생은 장춘단 공원 뒤편에 있는 고계 원예학교 뒷산까지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탈출을 하여왔다. 이 사건이후에도 선생은 끊임없이 괴한들에게 미행을 당하였다. 공포에 시달리던 숙부님과 나는 여운혁, 박 승복과 함께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섰다. 그 때 산 것이 흉가라고 소문난 별장이었다. 집 주인이 준공을 앞두고 죽어서 흉가가 된 그 집은 육 칠 년 간 비어있긴 했으나 썩 견고해 보였다.

신당동 집을 처분하고 이 별장으로 이사하려니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층 다락 속에 보관해 둔 다량의 무기였다. 이 무기는 원래 일본군에 의해 전쟁터로 수송되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가려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영등포 역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리가 수거해 이층 다락 속에 보관해 두었는데 일본제 구식 장총과 일본도 등 육십 여 점이었다. 우리는 생각 끝에 모두 분해하여 집 뒷마당에 땅을 깊이 파고 묻었다. 나중에 이 무기로 인해 받을 고통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체.

감나무 가지에 노란 감이 주렁주렁 달린 늦가을에 우리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나라 정세는 미군정의 실시와 정파 싸움으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라 돌아가는 꼴에 크게 낙심한 숙부님은 정치 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이상촌 건설에 임하자고 결심하셨다. 원래 흙을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숙부님과 운혁 아저씨가 농촌 개척사업에 열중하시는 걸 보며 나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의 청년들을 계몽 지도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평화로운 날들이 지났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세시 경이었다. 배 밭 과수원에 농약을 살포하고 잠시 집에 들어와 쉬고 있으려니 윗마을의 강봉용이 달려와 몽양 선생이 저격을 당하여 서울대학 병원에 안치되었다는 비보를 전해주었다.

"강군. 어디서 그 소리를 들었는가?"
"조안출장소에 갔다가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릴 들었어. 방송이 나오는 걸 들었다는 군, 통분할 이야."
"어떻게 저격을 당하고 돌아가셨는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자세히는 듣지 못했으나 오후 한 시경 혜화동 로타리에서 괴한에게 권총으로 저격을 당하여 병원으로 옮기던 중 차내에서 절명 하셨다고 하네. 계속 방송이 나온다고 하네."

"급기야 저격을 당하셨구나. 아........아... 하늘의 별들이 하나 둘씩 이렇게 떨어져 나가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까."
비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등뒤에 맞은 흉탄으로 인해 선혈로 붉게 물든 상의를 입고 있는 그 분의 시신을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사실 숙부님은 몽양 선생에게 비정한 정치게임에서 물러나 신앙생활과 농촌 지도자로서의 소명을 다하자고 수차 권하였다. 끝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가신 선생님을 보니 진작에 숙부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선생님의 장례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근로인민당 장으로 거행되었다. 장례식 땐 국상을 당한 듯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해는 광화문 네거리 당사를 출발하여 시청 앞, 을지로, 서울 운동장을 경유해 장지인 우이동 골짜기로 가서 대봉에 안장되었다. 존경했던 선생을 떠나보낸 나는 비통한 심정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철을 맞이하여 농촌은 더욱 바빴다.
과수원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서울의 숙모 님에게서 급히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간밤에 숙부님과 운혁 아저씨가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올라가 내막을 알아본즉 작년에 신당동 집에 묻은 무기가 원인이었다. 장마철에 내린 폭우로 인해 땅이 깊이 패여 묻어둔 무기가 집 주인 눈에 띈 것이다. 집 주인은 무기를 보자 당황

하여 성동경찰서에 신고를 하였고 전 주인이었던 숙부님과 운혁 아저씨가 바로 구속된 것이다. 두분 외에도 박숭복이 구속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세분은 이구동성으로 세분만의 모의 행동이었다고 진술하였고 그 덕분에 나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세분의 죄목은 무기 은닉죄였다. 숙부님은 주범자로 지목되어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셨다. 무기를 완전 폐기하여 매몰하였으니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그리 일이 커지고 보니 난감하기만 했다.

이십 여 일 간의 경찰수사가 끝나고 세 분은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나는 숙부님을 구해드리고자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몽양 선생과 친분이 두터운 홍순엽 변호사와 홍 변호사가 추천한 정주영변호사를 선임한 후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협조 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시골에 계시는 아버님께서 돈을 좀 보내주셨지만 그것으론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인심은 야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숙부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조차 혹여 자신에게 피해가 있을까 기피하며 외면하였다. 반드시 도와 줄 것이라고 믿은 사람에게서 야속한 말을 듣고 빈손으로 돌아설 때는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숙부님은 징역 유월을 선고받았다가 복역하시던 중 삼일절 경축을 기하여 가출옥을 하셨다. 다른 두 분도 같은 날 가출옥을 하여서 그나마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