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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우리 집 영감


BY 만석 2023-03-24

"엄마. 주무슈?" 10시가 넘은 시각.  딩동거리며 폰으로 문자가 날아든다. 이 늦은 시각의 문자라면 식구들일 게다. 아니나 달라. 막내딸아이한테서 온 문자다. 잠이 들었나 싶어서 문자를 보냈다 한다.
"주말에 어디 가세요? "
주말도 나름이다. 토요일에 다녀와야 일요일은 여유롭게 쉬고 월요일의 출근이   순조롭다 한다.  워낙 대충 사는 살림이라 누군가 방문을 한다 하면,  혼자 부산스럽다.  청소도 둘러 보아야한다.  창문틀에 끼인 먼지도 털어내야 하고., 토요일에 하려던 화장실 청소도 하루를 당겨야 한다.

영감은 레스링 중계를 보느라고, 아예 TV 속으로 들어갈 테세다.
"여보. 토요일에 막내 네가 온다네요. 가을이(애완 견)가 꾀재재한데 목욕 좀 시키지요."
영감은 위압적으로 시키는 일은 절대로 협조하지 않는다.  아는 일이니 의논껏 의향을 묻는다.
"힘 들어. 귀찮아. 당신이 해."
두 번도 말을 뱉어보지 못하게 단호하게 거절을 한다. '심사가 뒤틀릴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저럴 땐 혼자 풀어지게 두고 봐야하는 영감의 성미를 나는 잘 안다. 아니나 달라?

다음 날. 영감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베란다에 묶여있는 가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한다. 목욕을 시킬 모양이다. 이럴 땐 내 말을 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뜻을 보여야 한다. 잽싸게 일어나 마른걸레를  서너 개 준비해서, 화장실 문 앞에 펼쳐 놓는다. 지금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줘서, 고마워하고 있다는 뜻을 알아달라는 무언의 바램이다. 작은 방에 걸려있는 드라이기도 걷어서 문 앞에 대령한다.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는 소매도 팔꿈치까지 걷고, 아주 큰 일을 하는 사람처럼 아니, '보라구. 나, 지금 당신이 원하는 일을 수행 잘하고 있다구.' 하고 내가 썩 고마워하라는 듯 정성껏 가을이를 씻긴다.

남자들이란 젊으나 늙으나 어린애 같다. 지금쯤 아주 흡족한 듯 감사하라는 무언의 영감 스타일의 닥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젊었을 적처럼, 몸을 배배 꼬우며,
"당신 최고야 히히."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이젠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나도 팔십이니 나이 값을 해야지.  열어 놓은 화장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봐 주는 것만으로도 영감은 익히 알 것이 걸랑. 젊어서는 시키지 않아도 비위를 맞춰주느라고, 자주 그리하기를 즐겼으니까. 그러구 보니 나도 늙기는 많이 늙었다는 말씀이야.

아항~.그러고 보니 영감도 늙기는 많이 늙었나 보다.  옛날 같았으면, 아마  가을이 목욕을 나한테 떠 넘기며 고집을 부렸을 터인데 말이지. 오늘 가을이 목욕을 시키는 영감을 건네다 보며 영감도 나도 세월이 변한 만큼 같이 변해가고 있음을 인지한다. 허긴. 그렇게 세월을 따라 변하지 못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사네 못 사네.' 하고 사단이 벌어지지. 그 대신 영감도 나도 말 수가 적어졌다. 영감은 몰라도 나는 영감에게, 생긴 것 답지 않게 젊어서는 애교를 잘 떨었던 것 같다. 어쩌다 오늘처럼 영감이 말없이 가을이 목욕을 시키면, 이제는 그게 '웃기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나도 사는 일이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어져버렸다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