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눈빛이 흐렸다. 돌아 가시기 전 친정 어머니의 눈빛이 오버랩 되며 덜컥 가슴이 내려 앉았다. 일년에 한 번씩 뵙는 시부모님들이 해가 다르게 연로해지심을 느끼지만 이번엔 정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을 만큼 쇠약하심이 표가 났다.
“어머니, 왜 이리 기력이 없어 보이세요? 그동안 어디 많이 편찮으셨어요? "
"아녀어, 워디 아픈데 없다아. 입맛이 없어 그려."
매 주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드릴때면 세상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행여 자식들 걱정할까 늘 괜찮다, 별일없다라고 하셔서 그러려니하고 지냈다. 아프시다 한들 당장 달려올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던 나는 어쩌면 그 말 그대로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남편은 회사 일이 바빠 나보다 일주일 뒤 늦게 시댁으로 왔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 젊을때 뭐이고 좋은 옷, 이쁜거 입고, 맛있는거 먹어라. 늙으면 뭘 입어도 이쁘지 않고, 맛있다는 것 먹어봐야 다 소용 없다. 돈도 쓸 때는 써 야지, 너무 아끼진 마라."
평생을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고, 아끼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걸 자랑으로 여기시던 시아버지께선 늘 열심히 일해라, 돈을 헛되이 쓰지 말고 저축해라 라는 말씀을 입이 닳도록 하셨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이 덧 없다는 생각을 하신 듯했다. 평소와 다른 말씀을 하시니 공연히 돌아가실 때가 다 되셨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마음이 서늘해 졌다.
"아, 그런디 니 안해 얼굴이 왜 이리 말랐다니? 잘 먹이고 살 좀 찌게 해라. 니 안해 헌티 잘혀어."
지난 몇 개월 성지 순례 가이드를 하느라 살이 빠져 얼굴이 홀쭉해진 것도 모르시고, 마치 당신 아들이 잘못해서 그런양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 아니랄까, 고맙게도 아들에게 며느리한테 잘 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지난해와 달리 한 눈에 봐도 핼쓱해진 나에게 그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내심 서운했는데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티브이에서 종종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부모님 모시러 귀농을 택한 분들의 이야기를 볼 때가 있다.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과연 이대로 우리가 해외 생활을 계속해도 되나? 더 늙으시기 전에 한 집에서 모시진 못하더라도 가까이서 돌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했다. 작은 아들 대학도 마쳐야 하고, 남편이 한국에서 그만한 직장을 다시 얻을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고, 더군다나 농사는 통 자신이 없다 보니 늘 시부모님 보단 우리 생활이 먼저였다.
"엄마, 몸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우리 그만 정리하고 들어 올까요?"
"뭔 소리여? 아 한국 나와서 뭣 헐려고 그려? 요즘 직장 구하기 어디 쉬운 줄 아니? "
"하이구우 농사는 아무나 혀? 너 들은 못혀. 아, 우리 걱정일랑 하들 말어 .너 들이 걱정이지, 한국은 약도 좋고 병원도 좋은데 뭔 걱정이냐아."
힘 없이 가만히 앉아 아버님 얘기 듣고 계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신 듯 손사래 치며 말씀 하셨다. 사실 시부모님도 연세 드시니 가까이 자식 두고 싶은 맘이야 왜 없었을까 마는 그래도 자식 형편을 더 생각해 주시는 게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함께하는 짧은 시간 시간이 귀하게 느껴졌다.
해마다 시댁에 와도 나는 손님처럼 부엌 살림엔 손을 대지 않았었다. 어머니 살림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어머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행여 내가 부엌에 좀 오래 있다 싶으면 얼른 나오라고 성화셔서 설거겆이를 한 게 다였다. 그래도 간혹 어머님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시는 상한 음식 몰래 내다 버리고, 찌그러진 양푼이나 반찬 물든 통은 버리고 새 것으로 사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더 쓸 수 있는데 내다 버렸다고 좋아하지 않으시길래 그 이후엔 부엌에선 설겆이만 했다.
그런데 이번엔 발 디딜 틈 없는 부엌 바닥과 숨구멍 없이 꽉곽 들어찬 냉장고 정리를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시아버지는 좋아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뭐라 하진 않으셨지만 공연히 부엌에 드나드시며 안절부절 불편해 하셨다.자존심 상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하긴 했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며느리 된 지 오래지만 그동안 어머님이 너는 아버지 입 맛 못 맞춘다 그러시며 손수 음식을 하셨기 때문에 시댁에서 내 손으로 음식을 해드린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번엔 점심 한 끼는 직접 차려 드렸다. 음식을 한지 나도 20여년 넘었는데 어찌나 긴장 되던지. 어머닌 입에 맞지 않는 싱거운 음식 드시면서도 타박하시지 않고 며느리 해 주는 밥 먹으니 좋다고 하셨다. 입맛 까다로운 아버님은 음식은 간이 맞아야 혀, 하시며 너의 시어메가 음식 하난 잘한다 하셨다.
올해도 시댁에서 열흘의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갔는지....
출국 전 날 서울로 가기 위해 고추가루와 들기름 든 가방을 챙겨두고 기차 역전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기다리는 동안 평생의 수고와 정직한 노력의 결과로 굵게 마디진 시어머니의 거친 손을 잡으며 내년에 또 오겠다 인사를 했다. 친정 엄마가 그러셨던 것처럼 시어머닌 내 손을 잡고 내년에도 내가 너를 봐야 할 텐데
서운해서 어쩌냐 하셨다.
택시 안에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택시 뒤꽁무니를 눈으로 쫓으며 엉거주춤 힘없이 나란히 서 있는 두 노인네가 눈에 들어왔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