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설렌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를 하다 보니 사랑을 운운하다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흩날리는 벚꽃을 보면 가슴이 살짝 동하는 것은 더벅머리에 까만 뿔테 안경,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던 두근거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 때, 그 때의 나는 하얀 피부에 크고 검은 눈으로 셋째 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던 아이였다. 거기에 남색 세라원피스에 검정구두를, 그 속에는 흰색 반 스타킹으로 깔끔을 떠는 새침떼기였다. 그 때는 대부분 운동화를 신는 게 보통이었는데 나처럼 구두를 신는다는 것은 그만큼 부를 나타내고 있어 주변 아이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한반에 한 명 정도 있을만한,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로 늘 혼자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내가 구두를 신게 된 것은 그만큼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시내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고 계셨는데 막내인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주셨다. 그래서 내 발에는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튼튼한 만큼 무거운,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서는 마음대로 뛰고 달릴 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칫 가죽이 벗겨질까봐 언젠가부터는 아예 노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더 멀어지게 되고.......
3학년이 되고 나서 얼마 후, 수없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가방 줘.”
깡마른 체구에 더벅머리, 거기에 검정 뿔테 안경을 쓴 남자 아이는 눈길을 하늘로 향한 채 손을 불쑥 내밀고 서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구둣방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약국 집 아들로 낯은 익었지만 한 번도 알은 척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마음속에도 구두를 만드느라 투박한 아버지의 손과 희고 가녀린 약국 아저씨의 손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괜한 적대심으로 어쩌다 마주쳐도 외면한 채 지나치곤 했었는데, 같은 반이라니. 그것도 가방을 달라니.......
나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도망치듯 달려 집으로 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매일 하교 길이면 그 아이는 내 앞에 나타나서는 가방을 달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발길을 옮기곤 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 아이의 눈빛이 허공에서 나를 향했고 나도 더 이상 뛰지 않고 걷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내 뒤쪽으로 서너 발자국 뒤에는 그 아이가 따라 걷는,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공부가 끝날 무렵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나는 그 아이의 우산을 함께 쓰게 되었고 다음날부터는 자연스럽게 같이 가게 되었다 그 아이의 손에는 내 가방이 들려 있고.
그 아이와 함께 걸으면 좋았다. 가끔 계단을 오를 때면 가위, 바위, 보 게임으로 내가 이겨 계단 꼭대기에 먼저 서서 웃음을 주고, 때로는 내 손에 쥐어주는 하얀 눈깔사탕을 먹으며 달콤함에 만족한 웃음을 짓고, 한 번쯤은 집으로 가던 길을 벗어나 동네 뒷산에 올라 숲을 헤집고 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럴 때도 그 아이의 손에는 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빨간 책가방이.
그렇게 여름을 보내며 초록빛 무성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을을 보내며 빨갛고 노란 고운 빛을 책갈피에 꽂고, 마법을 부린 듯 눈으로 바뀌는 하얀 세상을 손꼽아 기다리는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 아이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약국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전학을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겨울 방학식을 하는 날, 그 아이는 반 친구들에게 전학인사를 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내 가방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어색한 손길로 나에게 내민 것은 하얀 눈깔사탕 한 봉지였다.
그 후로 하얀 눈깔사탕을 먹을 때마다 나는 그 아이를 떠올렸고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곁이 허전하다는 것을, 그 아이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도. 그리고 수많은 해를 보내면서 깨닫게 된다. 그 아이가 나의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지금쯤 그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나를 기억하고는 있을까? 이제 봐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세월이 흐른 지금, 문득 아이가 보고 싶어진다. 가슴 속에 퇴색해버린 설렘의 작은 날개짓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