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그 옛날,
우리집에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금성라디오"라는 것이 있었다.
크기도 요즘것 못지않는 그런것이었다.
오랜세월이 지났음에도
금성라디오는 아이보리 색깔에
다이얼에 빨간 글씨로 금성이라고 쓰여져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이 흘렀음에도 금성라디오에대한 추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요즘과 다르다면
지금은 라디오는 자기 개인의소유로 쓰여지지만
그시절 금성라디오는 온동네 사람들의 소유물처럼 쓰여졌었다.
안방에서 사랑방으로 스피커줄이 연결되어
온동네 사람들이 다 청취할수있는그런것이었다.
우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전에 하신말씀.
'옛날 라디오는 참 재밌었는디....
마치 금성라디오에서 이야기를 지어낸듯한 표정이셨다.
그 어린시절.
오후만 되면 라디오에서 재봉틀 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느때는 짚동가리위에 누어서 재봉틀 소리를 듣기도했고
마당에서 사방치기를 하면서 그 재봉틀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마당에서까지 재봉틀소리를 들을수 있었던건 아마도
스피커 하나가 더 있어서 마당에서도 들을수 있었던것이리라.
일찌감치 과학을 하신 아버지께서 손수 그렇게 스피커를 설치하신듯.
나는 늘 그 재봉틀 소리를 즐겨왔다.
그 시절에도 혼곤한 고요속에서 즐기는 재봉틀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기하던지.
그리고 무척이나 궁금했다.
엄마가 쓰시던 재봉틀은 무척이나 큰데
나보다 더 큰 재봉틀이 어떻게 그속에 들어가있는지
그리고 그 재봉틀을 돌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은 밥을 안먹고 어떻게 그렇게 재봉틀을 잘 돌리는건지?
참으로 궁금하고 신기했다.
곰곰히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재봉틀
저걸 팍 !
갈라보고 싶었다.
언제 저것을 뻐개보나....
딱 한번 재봉틀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소심천만이었던 나는 한번도 라디오를 갈라보지도 못했고,
재봉틀을 돌리는 사람은 더더욱 만나지 못했다.
어느날 엄마를 따라서 닷세에 한번씩 장이서는 광정장엘 따라갔었다.
라디오방이 있었다.
그곳을 기웃기웃.
마치 엄마가 꼬부랑 파마머리를 하러간터이기에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재봉틀 아줌마는 없었다.
아 ` ~ 그랬던것 같다.
재봉틀을 돌리는 아줌마는 없었어도 세워놓은 재봉틀은 있었던것같다.
에이~
얼마후에 나보다 네살이나 많은 오빠에게 물어봤다.
요즘엔 왜 라디오에서 재봉틀소리가 안들리냐구....
짓굿은 우리오빠
실실웃으며 하는말
라디오속에 악기라는게 있어서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했다.
나는 더 궁금했다.
저렇게 작은 라이오에서 재봉틀 돌리는것도 신기한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있을까?
악기가 뭔지 몰랐기때문에 악기에대한 궁금증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있을 금성라디오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었다.
결국,
나중에 성인이되어 알아냈던 오케스트라 연주를 알게되면서
피식 웃으며,
"옛날 금성라디오는 재봉틀을 아주 잘 돌렸느리라."
지금 생각하면 오케스트라 연주의 박자감이나
엄마가 돌리던 재봉틀의 박자감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것 같다.
그때 금성라디오를 뻐개봤더라면 ...
지금보다 더 성공한 여자로 살수있었을까?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실실웃던
오라버니는 천재소리를 들으며 한양으로 유학을가서 모대학 교수노릇을 하다가
얼마전에 퇴직을 하셨다.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작은 소도시에서 예술놀이를 하고 있다.
그때 금성라디오를 팍팍 뻐개보고 꾸지람듣던 여자였더라면 어떻을까?
아마도 과학쪽으로 갈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금성라디오속에 재봉틀 아줌마를 간절히 그리워했던
감성이 타오난 여자였기때문에
결굴 나는 예술놀이를 아주 재미나게 하고 있다.
붓을 잡은지가 15년이 넘은것 같다.
요즘 대학에서 벽초 박홍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선생님의 작품이
극치에 다달아
신비를 넘어서 무어라 할까 !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문득 문득 선생님의 붓을 팍 뻐개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아릿한 옛추억 금성라디오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