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집을 사서 아파트로 입주를 하던 날은 가을이 저물던 만추의 계절이었다.
부엌 창 레이스 커튼 사이로 나뭇잎은 무지개가 걸려있는 듯 칠색 찬란했었다.
하얀 창틀, 하얀 싱크대, 하얀 문, 하얀 화장실 타일을 매일 쓸고 닦았다.
초등학생 딸과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들을 키우며 집안을 윤이 나도록 가꾸고 치웠다.
베란다엔 바이올렛 꽃을 창가에 한 줄로 나란히 줄 세워 놓고 키웠다.
햇볕이 좋아 바이올렛은 연분홍, 진분홍, 연보라, 짙은 보라, 흰색이 섞인 연보라,
흰색, 자주색으로 피어 벨벳 같은 꽃잎이 화려하면서 따스한 빛을 발사했다.
결혼해 처음으로 포근하고 따스했던 겨울을 맞을 수 있었던 그 해도 지나가고,
새로 산 아파트에서 추운 겨울이 세 번쯤 지나갈 때 남편은 병이 재발하듯
다시 방랑벽과 밖의 놀이에 한쪽 발을 들여놓더니 두발이 몽땅 빠져 뺄 줄을 몰랐다.
일 때문에 외박이 잦은 줄 알았더니 같이 도박을 하던 거래처직원 부인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일하느라 외박을 하는 게 아니고요. 도박하느라 안 들어왔던 거에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밤새 베란다 창을 바라보다가 새벽여명이 밝아 오는 하늘을
소박맞은 여자처럼 남편을 기다리던 날들이 먼지 쌓여가듯 쌓여갔다.
“거래처 마누라들은 기다리지 않고 잠만 잘 잔다던데, 잠도 안자고 왜 기다리고 그래?”
“………..”
나는 말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내가 죄인이구나 했다.
나는 미물에게 해답을 얻으려는 듯 물을 주면 잘 자라는 꽃을 베란다 가득 심었다.
“청승맞게 꽃만 들여다보고 꽃이 말을 시켜? 청승맞게시리……”
남편은 꽃을 좋아하는 나를 청승맞은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허무하고 지루한 시간을 책을 보며 채워야 했다.
“책을 보면 돈이 나와? 책에서 뭘 가르쳐 주기나 해?”
“그래, 책이 돈을 벌어다 주진 않지만 도박을 하라고 가르치진 않아!”
“남자가 일하느라 도박을 할 수도 있고 술을 먹을 수도 있지. 내가 굶겼어?”
이런 인간과 대화는커녕 말도 섞기 싫었다.
우린 점점 말이 없어지고 각자 알아서 살아갔다.
그래도 아이들은 내가 낳았으니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였다.
남편이 술 먹느라 도박을 하느라 안 들어와도
나는 아들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딸아이와 함께 산책을 수도 없이 다녔다.
가까이 눈을 마주쳐야만 보이는 들꽃 냄새를 맡으며,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꽃 이야기를 많이 해줬고,
엄지 손가락만한 나방 애벌레를 나뭇가지로 찌르며 까르르 웃었고,
등이 형광색인 곤충을 잡았다가 살려주며 자연을 많이 접하게 해 주었다.
하루 세끼 골고루 반찬을 해서 먹이고 간식도 시간 맞춰 해 먹었다.
밤이면 두 아이를 옆에 끼고 책을 열 권씩 구연동화 식으로 읽어줬다.
적은 월급을 쪼개가며 적금을 조금씩 부었지만 남편은 돈이 조금 모일 만하면
직원들 월급 줘야 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남편은 월급을 받고 일하다가 조그만 공장을 하게 되었고,
몇 번은 주다가 나중엔 없다고 안 줬다. 줘봤자 밑 빠진 독에 물붓기란걸 터득하게 되었다.
급기야 남편은 나 몰래, 나 몰래라고는 했지만 집을 시댁에서 사줬기 때문에
남편이름으로 되어있는 집이라서 내가 막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 생선 집어가듯 안주인 몰래 집문서를 가지고 가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사채를 끌어들였다.
남편은 사업을 한다는 핑계로 술을 실컷 마시고, 도박을 실컷 하고,
밖에서 노는 게 너무 좋아서 내게 갖다 줄 돈은 물론 나와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난 울며 사정도 해보고, 내 잘못이 있음 고치겠다고 무릎까지 꿇었고,
아이 둘을 봐서라도 정신차려 살자고 다독이기도 했다.
남편은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하나도 알아서 하지 않았고,
너무 낙천적이고 너무 노는걸 좋아하는 병이 있었고, 이 병은 고칠 수 없는 고질병임을
결혼 후 십 년이 지나고 나니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차라리 죽어! 밤새 놀다가 왜 기어들어오냐고 차라리 죽으면 내가 기다리지 않잖아.”
우리의 결혼이 끝을 향해 갈 때쯤엔 난 남편더러 죽으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남보다 못한 하찮은 존재로 전략해버렸고, 서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나에게 남편은 손잡이 없는 도끼였고, 대가리 없는 망치였다.
결혼 후 15년째 되던 해엔 남편이 하던 사업은 부도가 났고,
집은 은행으로 사채 빚으로 주변에서 빌린 돈으로 사방으로 찢어져서 먼지 되어 날아갔다.
내 손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15년 세월 동안 결혼생활은 먼지였다.
남편은 도망자가 되어 정처없은 신세가 되었다.
“잘됐네, 집에 들어오길 감옥 들어오듯 싫어했잖아? 맘껏 떠돌아보라고!”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엄마네로 들어갔다.
엄마와 나는 안방에 풀썩 주저앉아 울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게 남편이 마지막으로 내게 해 준 것이 이혼이었다.
부도가 날 무렵, 은행에서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빚 갚으라는 전화가 많이 왔다.
하다못해 친정엄마네 까지 전화가 와서 남편이름을 대며 빚을 갚으라고 했단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아이들도 친정엄마도.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편이 내게 선물처럼 해 준 것이 이혼이었다.
그때 내 나이 사십이었고, 딸아이는 고등학생이었고, 아들은 초등학생이었다.
엄마가 안방을 내 주었다.
나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바보가 되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때 엄마네 아파트 11층에서 내 나이 또래 여자가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했다.
나도 그녀처럼 자살을 생각하며 많은 갈등 속에 석 달을 보냈다.
엄마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 아이 둘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을 자살로 마감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송장처럼 마르고 시꺼매진 얼굴을 들고 일어났다.
장사를 해서 낡지만 작은 아파트를 샀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밑바닥생활이었기에 무시도 많이 당하고 몸도 많이 힘들었다.
엄마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울 수가 없어서 버스 안에서 울었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인적 없는 공원을 거닐며 울었다.
한두 번 새 출발의 꿈도 꾸었지만 결론은 혼자가 편했다.
조금 먹고 조금 싸며 살기로 했다. 저축할 돈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웃음을 저축할 수 있었다.
딸은 예쁘게 커서 알아서 대학가고, 알아서 유학 가고, 알아서 직장 구하고, 알아서 결혼을 한다.
아들은 국립대 화학공학과를 들어가더니 장학금을 받아 공짜로 대학을 다니고 있다.
딸은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 각자 알아서 돈 벌어 써야 돼. 알았지?”
남편과 이혼 후 십 년 만에 만나게 되었고, 도박도, 술도, 담배도 끊었단다.
한 달에 두 번씩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고기 사준다고. 처음엔 애들만 내 보냈다.
그러더니 생활비를 쓰라며 돈을 보내줬다.
뭐! 아이들 아빠고 당연히 받아도 되니까 떳떳하게 받았다.
우린 과거는 잘 끄집어 내지 않는다. 서로 상처를 긁어 아프게 할 필요도 없으니까.
가끔 내가 옛날에 좀 잘하지 그랬으며 얼마나 좋았어? 하면
이 인간이 하는 말 좀 보소.
“난 후회하지 않아. 남들은 부도 내면서 빚도 안 갚고 내 살길 찾아 꿍 쳐 둔다는데,
나는 안 그랬어. 그래서 후회하지 않아.”
“벼어엉시이인~~~그래, 넌 방 한 칸 전세집도 없고, 나와 애들은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고!”
남편은 월세 방에서 산다. 아직도 신용불량자고,
“어디다가 후회 없다는 말을 해? 그 입을 찢어 놓을까 보다.”
우리 넷은 각자 알아서 산다.
남편은 월급쟁이로 일하고 있고,
딸은 가을에 새 가정을 꾸미고,
아들 아이는 알바를 해서 용돈은 물론 생활비까지 조금 보탠다.
나는 지금 일하는 곳에서 인정을 받아 잘 다니고 있다.
우린 벼랑 끝에 있었지만 이젠 시작점에 서서 잘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