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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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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시절 그리고 꿈


BY 그대향기 2015-07-29

철없던 시절 그리고 꿈

 

 

내 성격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할 때는 털털하고 수더분하다고 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몇명이 모이면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왁자하게 꺼내서 즐겁게 만들기도 잘한다. 

누가 시키거나 훈련 받은거는 없는데 어릴 때 부터 밝아도 너무 밝은 성격이다. 

초등학교 때 통지표에 가정란에는 늘 남자같은 성격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남을 잘 웃긴다는 것도 단골이었다. 

초등학교 때 남학생 코피도 나게 만든 핵주먹의 소유자다.ㅋㅋㅋ 

 

내 유년시절은 암울했다. 

가정을 등진 아버지와 5남매를 안 굶기려고 동분서주 늘 바빴던 엄마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일찍 철이 든 것 같다. 

아버지의 군기피로 만주까지 피난을 가는 바람에 

집과 토지를  몽땅 빼앗기다싶이 하고 알몸으로 다시 시작했던 부모님. 

요즘처럼 일자리도 흔치 않던 시절에 참 힘들게 살아오셨다.  

 

가난은 했지만 조금씩 재산을 일궈가던 중에 아버지의 실명과 좌절은 

또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 놓았고  아버지의 술주정은  점점 심해졌다. 

엄마는 5남매 배 안 곯고 남 부럽지 않게 가르쳐 보려고 안 하는 일 없이 

손발톱이 다 빠지고 볕에 굽힐 정도로 많이 탔지만 그래도 어린 자식들 때문에 참아냈다. 

손바닥만한 빈터만 있어도 5남매 먹일 푸성귀들을 심었고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어디에 꽁꽁 숨겨 놓은 비상금이었던지 엄마는 가짓수는 적더라도 맛깔나는 반찬을 올렸다. 

 

엄마는 음식솜씨가 좋았다. 

작고 아담한 손으로 조물조물 뭘 해 놔도 근사한 반찬이 되었고 

뚝배기에 게된장 하나를 끓여도 밥도둑이 되게 만들었다. 

제대로 구색갖춘 부식으로 반찬을 만들었더라면 일품한정식이 될 그런 솜씨였다. 

동네에 잔치가 있으면 엄마를 불러갔다. 

손이 맵짜고 실수가 없다며 엄마를 제일 먼저 부탁해 놓을 정도였다.   

 

 부잣집에서 시집올 때 속바지며 이부자리에 지전을 넣고 시침질을 해서 왔다던 엄만데 

남편복은 없으셨던지 고생은 엄마말처럼 책으로 엮어도 한지게는 더 나갈거라고 했다. 

어린 시절 방학만 되면 외갓집에 놀러가고 싶었던 나는 말리는 엄마하고 사나흘은 싸워야했다. 

외갓집 동네에 버스를 내리면 큰외삼촌 땅을 안 밟고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한다 할 정도였다. 

그런 반면 엄마는 다 잃어 너무나 가난했기에 혹여 우리가 외갓집에서 푸대접이라도 받을 까 봐  

외갓집에 놀러가는 것을 말리셨다. 

 

그런다고 기가 죽을 내가 아니었다. 

엄마의 자존심이나 이런것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동갑내기 외사촌들(주로 남자)하고 놀 욕심에 

방학만 했다 하면 외갓집 갈 가방을 꾸리곤 했다. 

엄마하고 작은 외삼촌 ,이모님만 따로 살았고 나머지 외삼촌 네분은 다 한 동네에 사셨다. 

일주일이나 열흘 쯤 이집저집을 나눠다니며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얼마간 받아 오던 용돈은 

외갓집에 가게 만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농사가 많았던 외삼촌들은 날마다 시장에 나가 농산물을 파셨다. 

과일이며 곡식도 있었고 가축일 때도 있었다. 

돈이 궁하지 않았고 우리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저기 저 넘어 밭 몇천평 요 앞 논 몇천평 이 넘어 산비탈에 심은 더덕 몇천평..... 

우리집에서는 듣기 어려운 땅 단위들이 오갔다. 

올해는 어디 땅 몇평을 샀고 누구네 논 나왔다는 소식 들리던데 어째 볼까싶어.... 

 

엄마가 자존심 상할만도 하게 생겼다. 

시집 갈 때 그만큼 챙겨 보내줬는데 다 잃고 빈몸으로 돌아 와 몸 상하고 자식들 안 돌보는 

여동생네 남편이 그리고 자식이 뭐가 이쁘고 반가울까? 

그래서 엄마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부득부득 우겨서 갔으니... 

지금 내가 그런 처지였더래도 말렸을 것 같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남의 밭을 세를 주고 얻어서 시금치를 심었다. 

어린 눈에 그 시금치 밭고랑은 왜 그리도 길던지.... 

남들 다 잠든 꼭두새벽에 엄마는 시금치 밭으로 나갔다. 

잠결에 조심스럽게 사각거리는 이불소리가 들리면 엄마가 나가는 소리다.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작은 엄마였지만 억척스러웠고 강하셨다. 

희뿜한 새벽에 시금치밭으로 간 엄마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금치단을 묶었다. 

 

다른 사람이 가까운 시골에서 리어카(내 초등학교 그 때는 경운기도 귀하던 시절)로 싣고와서 

도매로 넘기기 전에 엄마시금치가 먼저 도매상에 도착해야만했다. 

아침밥 하기 전에 시금치단을 묶어서 머리에 이고 온 엄만 아침준비를 하는 동안 

물에 적신 보자기로 시금치단을 덮어놨었다. 

바로 물을 뿌리면 도매상들이 안 좋아한다며 물에 적신 보자기를 덮었었다. 

정성스럽게 시금치단을 꼭꼭 여미던 엄마의 간절한 손길. 

 

아버지는 출근이 일렀다. 

일을 해 봤자 아버지술값으로 다 나가는 거였지만 출근은 꼬박꼬박 잘 하셨다. 

아버지출근과 동시에 엄마는 시금치를 리어카에 싣고 꽤 멀었던 시장으로 끌고나갔다. 

내가 끌거나 밀기도 했고 엄마가 끌거나 밀기도 했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나갔고 다른 사람들 시금치단 보다 컸기에 잘 팔렸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오빠들 학용품이며 육성회비는 들고가게 했다. 

 

시금치밭 가장자리에 들깨도 심었다. 

들깻잎을 따서 간추려 단을 만들어 주면 저녁시간에 소매로 팔러가는 건 나였다. 

오빠들은 창피하다고 아무도 안 가고 엄마는 다른 일로 바빴기에 

엄마가 만들어 준 깻잎단과 풋호박 몇개를 소쿠리에 담아서 시장 입구 남의 가게를 피해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옆에 좌판을 펼쳤다. 

올망졸망. 

 

좌판이래야 깻잎단 몇개와 풋호박 몇개였지만 다 팔아 엄마를 갖다드리면 

다른 반찬이나 간식을 해 주셨기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뭐든 팔러갔었다. 

동네사람들을 만날수도 있었고 엄마 손을 잡고 장에 따라나온 내 친구들을 만날수도 있었다. 

실지로 만나기도 했다. 

창피하다는 생각은 없었고 엄마가 대견하게  여기시던 모습이 더 강하게 남아있었기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집안 일을 도울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늘 쪼들리는 엄마를 곁에서 봐 왔기에 엄마가 기뻐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남의 밭에서 훔쳐 온 물건을 내다파는 것도 아니었고  엄마가 힘들게 일해서 농사지은건데 

전혀 부끄럽지 않았고 자손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도매보다는 소매가 더 많이 남는 장사라는 걸 그 때도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배를 가진 선주셨고  무역을 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으셨는지 장사에 수완이 좋았다. 

엄마 바로 위의 이모는 가정적이고 집 밖에는 몰랐는데  

엄마는 그 바쁜 중에도 시에서 하는 봉사활동도 자주 다녔다. 

오빠들이 어릴 때는 작은 방에 다 자게 하고 아랫방 하나를 비워 

경주역에 볼일이 있어 오는 장사꾼들에게 잠을 재워주고 돈이나 곡식을 받았다. 

 

현금은 저축을 하고 곡식은 양식을 하고 과일을 받으면 오빠들의 간식을 하며 

조금씩조금씩 재산을 일구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엄마의 불씨는 꺼지고 말았다. 

집에 낯선 사람들을 들인다고, 여자가 건방지게 바깥일을 한다며 

아버지의 자존심에 흠집이 나는 일이라며 못하게 했단다. 

엄마 친구는 그 일로 제법 큰 목돈을 거머쥐었다며 늘 아쉬워했다. 

 

깻잎팔이 어린 내가 호객행위도 했던 기억이 난다. ㅎㅎㅎ 

깻잎단이 크다는 것도 말했고 풋호박을 금방 따 온거라고도 했던 기억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건지 나는 어릴 때 부터 세일즈에 재주가 있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남포동의 모백화점에서 스포츠의류를 팔 때도 매상이 좋았다. 

같은 브랜드 다른 백화점매장보다 언제나 매상이 좋았다. 

이유가 뭐였을까? 

 

고객의 심리를 잘 이용하기도 했다.  

물건을 싱싱하게 보이도록 집에서 나갈 때는 젖은 보자기로 덮어갔고 

시장에서는 그늘진 곳만 찾아 앉았다. 

시장에서 좌판을 고정적으로 하는 장사꾼들도 어린학생이 팔러 나오니 내 쫒지도 않았다. 

배짱인지 넉살인지 나는 그랬다. 

사람들 눈길을 피했던게 아니라 오히려 눈을 마주치려고  고개를 들고 지나는 행인들을 바로봤다.

 

나는 지금도 장사를 하고 싶다. 

월급받는 이런 직장말고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장사. 

단돈 천원짜리 냉차장사도 좋고 한그릇에 2천원하는 뜨끈한 콩국장사도 좋다. 

한달에 한번 받는 월급말고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장사가 하고 싶다. 

죽기 전에 내가 잘 할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싶다. 

요즘 부쩍 더 그렇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간다고 했다. 

봄이 가면 여름오고 가을이 깊어가면 겨울 오듯이 

그렇게 사계절을 바꿔가며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아니 늙어가다보면 

정작 내가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을 단 한번도 못해보고  꼬부랑 할머니가 될까  두렵다. 

이미 여러번 기회를 잃어버린 나지만 더 나이들기 전에 하나는 꼭 해 보고싶다. 

장사를 해서 대박을 터트리겠다는 생각보단 하고싶은 일을 해 보고싶은거다. 

 

아쉽게도  당장 그렇게 할수는 없다. 

아직은 해결해야할 숙제가 많다. 

내가 하고싶다고 일을 놓아버릴수가 없는 것은 나는 엄마고 나는 이곳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기반은 닦아주고 무리없이 흘러간다 싶을 때 

뚜버기 걸음을 멈추고 그 때는 미련없이 내 꿈을 실현하고싶다. 

그 날까지는 잠시 접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