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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이 쓰는 편지(8)


BY 편지 2014-11-09

결혼한 지 15년 만에 이혼을 했다.

시청 안에 있는 임시재판소는 오래되어서 허름했다.

서류를 냈더니 기다리라고 했다.

여름을 지나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라 시청안 이층은 후텁지근했다.

먼지 잔뜩 묻은 창문은 닫혀 있어

창문을 열려고 했더니 잘 열리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더니 삐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손끝에 먼지가 달라붙었다.

휴지를 꺼내 먼지를 닦았지만 인주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

창아래엔 푸른 향나무 한그루와 담 모퉁이에 핀 코스모스가 보였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구나. 남편과 난 서로 딴 곳에 서서 판사를 기다렸다.

난 덤덤했다.

뭐든 예견된 일은 막상 그 일이 닥치면 침착해지고 냉정해지고 무심해진다.

 

남편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 표장을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남편은 날 때리거나 욕을 하거나, 상습적으로 바람을 피웠거나

그러지 않았으니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편의 잘못은 크게 세 가지였다.

도박과 술과 방랑벽 그래서 월급도 못가지고 왔고,

그래서 시집에서 마련해준 집을 팔아서 빚을 갚아야했고,

그래도 사채 빚을 다 갚지 못했고, 아이들과 난 머물 곳이 없어졌다.

난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도망자가 되어 숨어버렸다.

 

난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해 눈물을 흘렸고,

친정 엄마는 동네 사람 보기 창피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땅보다 더 낮은 곳에 내가 있는 것 같아서 몸이 자꾸자꾸 구들장 밑으로 가라앉았다.

벽과 천장에 낭떠러지, 끝과 죽음 이런 글자만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두 눈만 꿈벅이길 삼개월. 일어나 앉아야했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얘들이 불쌍했다.

 

연립주택과 주택사이 골목에 권리금도 없고 보증금도 아주 싼

허름한 가게를 얻어 과일과 채소가게를 열었다.

봄엔 가게 앞 가로수 밑동에 일년초를 심었고,

여름엔 수박화채를 만들어 손님에게 시식을 했고,

가을엔 호박고구마를 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먹고 가라고 했다.

겨울엔 난로도 피지 않고 양말을 두 개씩 신고 털모자와 털장갑을 끼고 장사를 했다.

다시 봄이 왔고 가게 앞에 플라스틱 화분을 놓고

체리세이지, 데이지, 팬지, 도라지, 별꽃, 백일홍, 한련화 꽃을 심었다.

그 해 여름엔 은행에서 우수고객으로 나를 대했다.

장사한지 삼 년째엔 작은 집을 살만큼 돈이 모아졌고,

은행에만 가면 대출을 해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죽음이란 검은색도 시간에 묻혀 조금씩 색이 엷어져갔다.

마치 한겨울 화롯불 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훈훈해졌다.

친정엄마도 동네 창피하다는 말은 쑥 들어가고,

집을 사서 얼른 이사 가라고 부동산을 들락거리셨다.

 

친정엄마가 서둘러 선택해준 작은 아파트를 샀다.

겉은 이십년이나 된 허름한 아파트였지만 안은 깨끗하게 수리된 집이라 꿈의 궁전 같았다.

친정엄마랑 손을 잡고 기뻐서 울었다.

아이들이 자기들 방이 생겨 좋아했다. 기념으로 개 한 마리를 새 식구로 맞아들였다.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사다 심었다.

분홍과 주황색 제라늄, 들꽃 쥐손이풀, 다육식물, 잎이 하트라서 사랑초,

모기 쫒는다는 식물과 허브과 난타나.

그리고 엄마네 집에서 엄마가 손수 분갈이 해 준 군자란.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온다고 하더니

집을 사 준 가게는 폐업신고를 해야만 했다.

옆에 큰 마트가 생겨 팽팽했던 과일은 쭈글쭈글 주름이 졌고,

채소와 계란은 썩어 나갔다.

한 달 임대료를 낼 수가 없어졌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 날아와 이 지구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을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 지구를 떠나게 될 것인가......

세상 바람에 흔들리는 이 외로운 나와 아이들과 친정엄마를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미련을 버리고 과감하게 가게를 정리했다.

남편과 이혼을 할 때처럼 덤덤하게 정리를 했다.

끝은 있지만 분명 이게 끝이 아님을 알기에.

엘리베이터가 노인네처럼 체머리를 흔드는 낡고 허름한 집이지만

다리 뻗고 쉴 수 있는 집이 있음을 알기에.

밤이면 밤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도 하는 친정엄마의 가슴 아픔을 알기에.

장사를 끝내고 밤늦은 시간에 오는 나만 기다리는 아이 둘이 있기에

나는 다시 벌떡일어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