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지 16년째로 접어든다. 처녀 시절, 결혼할 때 사표를 내고 직장을 그만두면 시집을 잘 갔나 보다 생각했고 또 그렇게 떠나는 동료가 부러웠다. 나에게도 사표를 내도록 할 능력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동경했던 희망은 32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을 직장에 묶여 있었다.
아픈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놓고 집을 나설 때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는 아이 울음소리는 골목을 돌아 나온 후 귀에서는 사라졌지만 머리와 가슴 속에서는 하루 종일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이를 봐 주던 아이도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이다. 어려운 시절 입을 덜기 위해 시골에서 데리고 온 아이, 지금생각하면 그 아이도 역시 어린아이였다. 밥 먹여주고 업어주고 제 힘에 겨웠는지 퇴근해 오면 어떨 땐 아이를 보는 아이도 내 아이도 울고 있었다. 그래도 있어주면 좋으련만 명절이 다가오면 겁이 났다. 산업화 열풍이 타오르던, 시절 명절이 되면 성의껏 챙겨 집에 보내면 친구 따라 공장으로 가버려 거의 일 년에 한 번씩 애 봐주는 아이가 바뀌었다. 낯선 누나와 정들 때까지 아이도 나도 한차례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엊그제 같은 40 년이 넘은 이야기다.
힘들었던 세월이 흘러 손녀가 제 아비 나이를 훌쩍 넘겨 재롱을 피운다. 어릴 때 직장관계로 떨어져 살았기에 아이의 커온 과정을 잘 모르는 남편은 예쁜 손녀 재롱에 푹 빠졌다. 제 어미가 걸어준 전화로 “하버지 보고 싶어 혜민이 하버지 집에 오고 싶다.” 가고 싶다. 를 오고 싶다고 표현하는 손녀가 귀여워 차로 10분 거리인 아들 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간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이토록 귀여워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제 아이를 귀여워 하니 좋으면서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원래 두벌 자식이 더 귀한 법이야” 라며 얼버무린다. 풍족하진 않지만 제 가족을 이끌어 갈 만한 능력으로 사는 아들들이 고맙게 여겨진다.
고생했던 시절이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다가 온다. 늘려 있는 시간은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바란다. 예의를 갖추어도 왠지 편편치 않는 새로운 친구보다 30여 년 곰삭은 옛 친구가 좋다. 직장동료와 모임이 있는 날에는 시집살이 하다 친정에 간 듯 푸근하고 편하다. 자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산악회와 같이 많은 인원이 모이는 날에는 아직도 내일이면 한 직장으로 출근 하는 걸로 착각할 정도로 지난 세월 속에 어우러져 하루를 보낸다. 육십을 훌쩍 넘어 칠십을 오가는 나이다. 가끔씩 들려오는 동료의 부음에는 가슴이 찡하다. 언젠가 다가올 여기모인 동료들의 일이기에 고인과 함께했던 일들이 그리워진다.
마주하고 있는 옆 지기는 그 옛날에 가족을 이끌던 가장으로서의 당당함은 어디가고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휴대폰을 챙겨 가느냐고 꼭 묻는다. 별 볼 일없이 남편직장에 전화 자주하는 거 꼴불견이라며 전화 못하게 하던 남편이 지금은 아내의 부재가 불안한 눈치며 부르며 대답을 금방 하도록 휴대폰 충전에도 신경을 쓴다. 큰 병을 치른 후는 나의 주가가 내 가정에서 상한가다.
늦은 퇴근 관계로 가정에 일을 완벽하게 못 했다 싶으면 사표 내라고 나에게 겁을 주던 남편이다. 우는 아이를 팽개치고 하던 일을 걸쳐놓고 만사를 젖혀두고 출근하는 내가 안쓰러워 그랬는지 아니면 돈 버는 아내의 기를 꺾자고 그랬는지 사표 내라는 말을 자주 해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밤늦도록 일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운동 경기에도 역전의 쾌감은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관중을 흥분에 도가니로 빠지게 한다. 암이란 큰 병으로 인해 나는 지금 달콤한 인생의 역전을 맛보고 있다. 6개월마다 받는 암 정기검사의 남편은 결과에 온 신경을 쓴다. 인터넷을 검색해 암의 좋은 음식을 프린트해서 건네준다.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약을 덜 친 채소를 가꾸기 위해 요즈음처럼 더운 날에도 밭을 향해 새벽에 집을 나선다. 두 아들이 폰을 자주 건다. 혹시나 낮 시간에 밭에 계실 아버지가 염려되어 10시 이후는 되도록 집에 계시기를 종용한다. 가정의 군기를 잡던 아버지는 70을 넘긴 노인이 되어 아들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병이 덧날까 봐 나를 밭에는 나오지 마란다. 선생님이시던 남편은 가족도 학생으로 착각할 때가 잦았다. 잘못된 곳은 귀신처럼 찾아내어 지적하며 나무라서 젊었을 때 아이들도 나도 깐깐한 성격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은 이 빠진 호랑이다. 듣는 척 하면서 그냥 넘겨 버리는 일이 많다. 못마땅하지만 봐 주는 줄은 나는 알고 있다. 밭에 가끔 나가면 남편의 수고로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격처럼 잘 정리된 밭고랑에는 땅콩, 콩, 들깨, 참깨 고추, 가지, 호박 옥수수 셀 수 없는 많은 채소들이 밭과 남편의 가슴에 풋풋하게 자라고 있다.
생, 로, 병, 사는 자연의 이치다. 긴 세월을 살다보니 전혀 맞지 않던 모난 부분들이 부딪쳐 둥글어져 간다. “당신 나와 결혼해 고생 많았다. 이 정도로 살 수 있는 것도 젊었을 때 억척스럽게 일한 당신 덕분이야 이제 당신 건강만 챙기면 돼 아이들은 다 잘 살게 돼있어 ” 젊었을 때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40 년을 넘게 살다보니 남편 입에서 이런 소리도 들을 날이 오나 싶다. “아직도 젊었다면 티격태격할 건데 하느님이 사람이 늙도록 잘 만들어 놨네요” 하며 나는 젊은 것처럼 남편에게 부아를 확 질러본다. 빙긋이 웃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황혼의 저녁노을은 아름답다. 인생의 황혼기도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 세상은 여자들이 많이 드세졌다고 말한다. 정년까지 일하다 퇴직하며 아내들이 이혼을 요구하는 황혼이혼이 젊은이의 이혼을 능가한다는 뉴스를 보고 왠지 맘이 씁쓸하다. 환갑을 지난 남편이 원수 덩어리, 짐 덩어리 구박 덩어리라고 항간에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노후를 함께 할 수 있음은 하느님의 축복이다. 자식들도 제 둥지를 털고 살기에 바쁜 일상에 간간이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한다. 노후의 부부는 서로의 비빌 언덕이고 힘이 되는 반려자야 한다.
부부 못잖은 게 노후에는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번 달에도 30여년을 함께한 동료들과 문경 계곡을 다녀왔다. 헤어질 때면 다음 달에도 꼭 나오라는 회장님 이하 동료들의 고마운 인사가 가슴으로 스며든다. 앞으로 얼마동안 이 모임에 참석할지 모르지만 젊음을 함께했던 옛 동료들이 있어 늙어감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