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이사 온지가 두 달이 넘어도 이웃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한 통로에 네 가구가 산다. 어쩌다보니 엘리베이터에서도 같이 만나 지질 안아
우유 주머니가 현관 문고리에 걸려 있는 걸 보아 좀 늦게 이사를 한 우리보다
먼저 이사 온 듯하다.
전에 살던 아파트로 이사를 갈 때 만해도 팥 시루떡을 하여 1층부터 12층까지
스물넷 집에 떡을 돌렸다. 지금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며
그 풍습도 옛 풍습이 되어버렸다. 남편이 여행을 떠나면서 누구든지 함부로 문을
열어주지 마르라고 당부를 하며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무서운 세상에 우리도 살고
있다며 조심하라는 부탁이다.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 계폐기에 한 늙수레한 남자가 떠있다. 왜냐고 물으니 윗층 목욕탕
수돗물이 내려가질 않아서 우리 집 목욕탕에서 손을 봐야 한다기에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리 늙었지만 혼자 있는 여자 집에 공사기구를 들고 들어와서 공사를 하니 그렇게
남편이 당부했는데 문을 열어 준 것이 곧 후회가 되었다. 집 안에 둘이만 있다는 사실이
왠지 불안했다. 혼자 두고 나가자니 찜찜하고 그냥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tv를 보고
있자니 지루해 애꿎은 냉장고 문만 열고 닫았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지나니 일을 잘 끝냈다고 고개를 푹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나갔다. 나가는 게 반가워서 얼른 목욕탕 소재를 하려고 문을 여니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하자보수 공사 청탁을 받고 관리실에서 보낸 사람임을 그때 알았다. 잠시
동안 사람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불안 해 했던 내가 그 노인 분도 알아 차렸을까?
불길했던 마음이 미안함으로 바꾸어졌다.
일부러 관리실에서 경력 있는 노인 분을 채용해서 일감을 주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문을
금방 열어준 것도 칠십을 넘게 볼 외관상 연세와 순해 보이는 용모가 나에게 편안함으로
다가 왔기에 의심 없이 열어 놓고는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고향집들이 그리워진다. 사립문을 닫아놓으면 사람이 없다는 표시다. 필요한 물건을 빌리려
가서 사람이 없으면 사립문을 열고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오고 갖다놓기도 한다. 손님이 와서
반찬거리가 없으면 남의 채전 밭에서 푸성귀를 뜯어 오기도 했던 것이 그 어려운 시절의
시골인심 이었다. 소먹이든 아이들은 소를 산에 올려놓고 밀 서리 콩서리는 지금 같으면
도둑으로 몰릴 일이다.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우리 조상들은 이웃과 나누고
품앗이라는 풍습으로 상부상조하며 열심히 도우며 살았기에 오늘의 삶의 터전을 일구어 왔다.
가족 간의 불신, 이웃과의 단절, 기러기 아빠의 처절한 절규, 내 아이들 손자 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부터도 그 행동을 후회는 했지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