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거리는 잔꽃무늬 쉬폰 원피스에 분홍립스틱을 바르고
거리로 나가 쇼윈도우에 내 모습을 비춰보며 쇼핑을 즐기고 싶은 3월의 봄날..
한국에서 돌아와 팽개쳐 둔 묵은 가방을 열어 정리를 시작했다.
\"서분조 환자!! 보호자 분되세요?\"
\"네... 왜 그러시죠?\"
\"서분조 환자 심장이 정지되었습니다.\"
나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될 때가 많다.
핸드백 속에 있던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해
수수깡인형처럼 훠이 훠이 도로에 나가 택시를 타고 병원을 향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엄마를 불러 볼 수 없구나....\"
너무 슬플 땐 눈물도 나지 않는걸 처음 알았다.
빨간 신호등에 차가 멈춰 섰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응급심폐소생술로 일단 의식은 깨어나셨습니다.\"
휘청거리며 도착한 응급처치실 문 틈으로 기도에 호흡기를 삽관하는 의료진들 사이
\'팔딱 팔딱\'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엄마의 배가 보였다.
그제서야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 요즘 부쩍, 자잘한 기억들조차 흐릿한 그림으로도 떠오르지 않는
내 기억의 보관 기간이 점점 짧아 짐을 느낀다.
분명 내가 넣어 둔 메모도 한참만에 기억해내는 일이 잦아지며
한국에서 가져다 놓은 가방에 넣어 둔 기억조차 없었다.
*
호흡기를 기도에 삽관 한 엄마가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하셨다.
수첩 한 면을 펼쳐 펜을 쥐어 드렸다.
\"내 가방 집에 갖다 놨나~ !! \"
ㅋ~~~^^
그간 일을 모르는 엄마는 병실이 달라진 걸 보고 핸드백 걱정을 했다.
집으로 가서 엄마의 핸드백을 챙겨오는 길에 무심히 안을 열어 보았다.
엄마의 젊은 사진이 붙은 주민등록증과 경로 우대증, 세계일주를 다닌 입출국 도장이 빽빽한 여권,
치료중이던 임플란트 영수증... 그리고 갱지로 된 봉투 하나가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엄마의 직업은 본업만 대 여섯 개에다 무자격 파트타임까지 합하면 열 개가 넘었다.
농사꾼, 한복디자이너, 화장품 외판원에 보험사원...
그리고 의사, 약사,한의사, 경찰, 카운셀러, 요리사...
신랑 신부의 한복에서부터 학교 운동회 단체 무용복까지 손으로 하는 일 가운데 못하는 건 없기 때문이다.
16년간 군단위 부녀회장을 하면서, 도박하는 남자들의 화투판을 홀랑 덮어 버리고 펄펄 뛰는 남정네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볏짚으로 반들 반들하게 기름칠 한 무쇠 솥뚜껑에
파전, 배추전을 붙여 막걸리 대접하며 설득하던... 용기와 담대함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눈으로 본 모든 것은 뚝딱 만들어 내는 \'신의 손\'을 가진 엄마.
돈도 빽도 능력도 크게 없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도 이런 엄마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누구의 아이든, 누구의 친척이든 .... 열 댓명의 아이들을 키운 것도 모자라서, 지나가는 양은쟁이와 생선장수까지 쉬도록 문을 열어 주었던 엄마를 찾아
대구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읍내에서 산길을 50분은 족히 걸어
오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북지역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핸드백에서 찾아 낸 노란 봉투 속에 그날의 젊은 엄마가 웃고 있다.
기사 끝 부분에 실린 막내딸, 나의 이야기도 미소 짓게 한다.
여러 기사 스크랩 가운데 두 장을 내 지갑에 넣어왔었다.
영원히 시간이 멈췄음 하는 바램을 담아 조심스럽게 비닐코팅을 했다.
사진은 나이를 먹지 않아 좋다.
이 기사가 나간 이후 엄마가 중매한 농촌총각은 200쌍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엄마의 능력, 성격, 솜씨, 마음씨.... 어떤 것 보다 내가 엄마를 존경하는 이유는 83세가 된 지금까지 단 하루도 새벽기도를 쉰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
암 수술 후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의료진까지 절망하던 그 순간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쉬지 않던 그 모습 때문이다.
이제 내가 중매쟁이 대를 이어야 할텐데....
어디 괜찮은 처녀 총각 없수?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구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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