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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화장대


BY 새봄 2013-01-09

내가 중학생이었고 막냇동생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흩어졌던 식구들이 모여 살게 된 곳이 왕십리였다.

그러면서 화장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전의 기억들은 깨진 유리창 같아서 엄마의 삶도 동생들의 삶도

내 삶도 조각난 상태라서 기억 창틀 속에 모여 있지 않았다.

 

왕십리 방 한 칸에 있던 화장대는 화장대가 아니었다.

누가 버린 앉은뱅이 책상이거나 문갑이었을 것이다.

니스 칠이 벗겨지고 뒤에 댄 베니어판은 벌어지고

서랍장 안에 십일조를 넣는 구슬가방과 같이

꽃가루처럼 가벼이 날리는 분과 뚜껑이 없는 눈썹 그리는 연필과

잘 지워지지 않는 루주가 들어있는 낡은 파우치가 있었다.

화장대 위엔 대나무로 얽은 바구니가 있는데

그 안엔 향이 짙은 스킨과 로션, 손거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 한자리를 차지한 큼지막한 콜드크림은 분위기 잡고 있는 장식품 같았다.

 

왕십리에서 노점을 하던 엄마는 밤늦은 시간에 들어와도 새벽녘에 들어와도

밥 먹듯 콜드크림 마사지를 하고 가재 손수건으로 닦은 뒤

그 손수건을 파우치 속에 넣고 주무셨다.

십일조를 훔치려 화장대 문을 열면 분 냄새가 코를 찔렀고,

덜 닫힌 화장품 가방 속에 분가루와 콜드크림이 묻는 가재손수건이 보였다.

엄마는 콜드크림 마사지를 한 뒤 양미간을 찌푸리고,

번들번들한 얼굴을 흔들어가며 하나님께 하루 일을 보고하곤 했다.

 

엄마는 스물여덟살에 과부가 되셨다.

물 건너 아버지를 묻고서도 엄마는 콜드크림 마사지를 하셨을까?

너희들을 데리고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단다, 수도 없이.”

엄마는 여러 번 도망을 가고 싶었을 것이고,

한두 번 남자 손을 잡고 재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질경이처럼 질기게 살아내셨고

돈 벌러 간다고 자식들을 친정에 맡기기도 하고,

작은아버지 댁에 갖다 놓기는 했어도 약속 없이 도망을 가진 않으셨다.

남자 손을 잡은 적은 있을지 몰라도 남자 손을 잡고 따라가진 않았다.

 

엄마가 처음 내 집을 장만하게 된 곳이 일산이었다.

그때 엄마나이가? 오십쯤 이였으니 지금의 나랑 같았겠구나.

내가 결혼을 하고 남동생 둘이 돈을 벌어 22평 아파트에

엄마만의 화장대를 산 게 그때가 처음이기도 했다.

삼단짜리 하얀색 서랍이 달리고 반달모양 거울이 붙어 있었다.

서랍 손잡이가 꽃무늬 법랑냄비 뚜껑에 달린 손잡이 같았다.

유리를 깐 화장대 위해 화장품을 한 줄로 늘어놓고,

주인공 화장품 앞에 조연겪인 화장품 샘플을 나란히 맞춰 놓았고,

젓갈통만한 콜드크림이 변함없이 화장대 한자리를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화장대 서랍을 두 손으로  열면

그 속에 돼지갈비가 자글자글 끓고 있을 것 같았다.

법랑냄비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끓이지 않았다.

법랑 냄비 속엔 소갈비는 드물었고, 돼지갈비나 그래, 돼지갈비가 있었다.

 

15년쯤 일산에서 살다가 분당으로 이사를 가셨다.

법랑 냄비 닮은 화장대는 버리고 그 격조에 맞는 나무로 된 화장대를 사셨다.

그때부터 엄마는 세수를 한 뒤에 얼굴을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부족이 신을 향한 의식 같기도 하고, 음악회를 준비하는 긴장감이 보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럼 얼굴이 팽팽해진다고 텔레비전에서 보셨단다.

엄마의 피부는 결은 고운데 나이보다 주름이 많았다.

남편 없이 삼남매를 키우셨으니 그게 다 얼굴의 주름으로 남으셨나보다.

다듬이질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탁탁 타다닥탁. 탁탁탁탁 타다다닥.

스킨을 바를 때도 로션을 바를 때도 풍상에 찌든 주름 펴지라고 다듬이질을 하셨다.

이제 엄마의 화장대 위엔 젓갈통만한 콜드크림은 없었다.

 

엄마의 방과 화장실 사이에 옷 방이 있는 넓은 곳으로 작년에 이사를 했다.

옷 방 맞은편에 붙박이로 있는 화장대가 있고

붙박이 화장대 위엔 천장을 뽕뽕뽕 뚫고 할로겐 등이 달려있었다.

고급스런 화장대 위엔 출세한 아들들이 사다 준

랑콤이니 크리스찬디올이니 무슨무슨 세럼이니 태반크림이니(진짜 사람태반이 들어있단다.)

내 동생들만큼 출세한 화장품들이 쫙 앉아있다.

엄마는 그 화장대에 앉아 화장품을 바르고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다듬이질 같지 않고, 아기를 재울 때의 손놀림 같았다.

늙어가는 세월을 토닥토닥 잠재우고 싶으신가보다.

고생도 끝나고 살도 찌고 좋은 화장품 덕인지 엄만 확실히 주름이 펴졌다.

주름이 쫙 펴진 얼굴에 명품가방을 메고 따스한 겨울날에도 밍크코트를 입고

교회를 가고, 형제들을 만나러 위풍당당하게 집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