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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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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의 꿈은?


BY 새봄 2012-11-26

제가 꽃 키우는 걸 좋아해요.”

낯익은 긴 머리 소녀가 대출할 책을 내 앞에 내민다.

그래요? 나도 꽃 키우는 걸 무척 좋아해서 안 기른 것 빼고 다 길러봤는데...“

농담을 섞어 대답을 했다.

소녀가 내민 책을 보니 두 권 다 꽃 기르기에 관한 책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꽃 좋아하는 사람은 표시가 나거든요.”

그 소녀 말은 내가 꽃을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다고 한다.

전 꽃이 넘 좋아요.”그러면서 꽃처럼 화사하게 웃는다.

무슨 꽃 키워요? 난 아파트에 살아서 아파트 화단에도 꽃을 기르거든요.”

전 햇볕이 안 들어오는데 살아서 키우고 싶은 꽃을 키울 수가 없어요.”

“...... 어린 소녀가 꽃 좋아하기 힘든데... 그 마음 넘 예쁘다...”

소녀는 주택 지하에 사나보다. 잠깐이지만 마음이 짠했다.

텃밭 도서관 주변은 아파트 단지와 주택단지가 섞여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대부분이고

주택주인은 부자지만 세입자들은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것도 지상보다 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도 꿈이 밝아서 소녀의 표정은 밝고 나도 밝아진다.

전 땅을 꼭 사서 꽃을 많이 기를 거예요.”

나도 고향이 산골인데 거기 가서 꽃 기르며 살 거예요. 몇 년 후엔 이루어질 것 같아요.”

고향이 어딘데요? 땅이 있으세요?”

강원도지만 아직 땅은 없어요. 땅 사려고 열심히 준비 중이랍니다.”

꼭 그러세요.”

소녀의 꿈도 꼭 이루어질 거예요.”

소녀의 꿈을 들은 그날 하루는 도서관 안이 내가 키운 꽃밭으로 보여

실실 쪼개며 흡족하게 바라보고 배시시 웃고 또 바라보곤 했다.

다른 이용자분들이 저 여잔 왜 저렇게 실실 웃고 다니나 하면서 이상하게 봤겠다.

 

반납하는 책에서 담배 냄새가 풀풀 나는 아주머니도

책을 한 아름 빌려가면서 담뱃진이 묻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신다.

부부가 같이 와서 다정하게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보면 정말 많이 부럽다.

칠십은 넘은 듯한 분이 옛날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싶다고 해서 찾아드렸더니

이 책 읽고 또 올게요. 하시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시기도 한다.

내가 공짜로 빌려주는 것도 아닌데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고맙고 보람 있다.

대출한 책을 선물을 받은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한아름 안고 가는 이용자들을 보면 행복해 보이고 행복할거라 생각한다.

나도 하루에 한두 권씩 책을 대출해간다.

한 사람당 다섯 권씩 빌려갈 수 있지만 무거워서 나는 하루에 한두 권씩 빌려가고

출근할 때 한두 권씩 들고 와 반납한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가방에 넣어 퇴근을 하면

내게 꼭 필요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이 행복하고 부자가 된다.

 

꽃처럼 예쁘게 피던 나뭇잎들은 희아리 고추처럼 빛이 바랜 늦은 가을이 왔다.

잎을 떠나보낸 나무들은 스산하지만 도서관에 오시는 이용자들은 스산하지 않다.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거나 옆구리에 끼고 가면서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결코 쓸쓸하거나 춥지 않다.

설령 쓸쓸하거나 부족하거나 외롭거나 가난해도 꿈이 있기에 희망이 있기에

오늘은 밝게 웃으며 말할 수 있다.

저 꽃을 좋아해요. 꽃 키울 땅을 꼭 살 거예요.”

열여섯 살 그 소녀처럼 말이다.

 

*   *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는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산문집을 보다 이 시가 좋아 적어 놨다가 오늘 글과 어울릴 것 같아서 올립니다.

가난하지만 결코 가난해 보이지 않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