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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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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할 수 있습니다


BY 허허연 2012-09-15

                                  엄마는 할 수 있습니다

 

성곽 안에서는 나비가 되기 위한 말의 경연이 한창입니다. \'나는 나비다\'라는 타이틀을 두고 순위경쟁으로 성공과 탈락 승자와 패자를 가리며 전쟁같은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나비가 되려면 일등을 해야 한다는 주최 측의 광고에 저마다 나비가 되려고 애벌레들이 모여 경연을 하고 있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가 될 수 있는 20퍼센트에 들기 위해 다른 애벌레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데, 오르고 있는 동안 경쟁률이 높아져 10퍼센트로 줄어들더니 이제는 1퍼센트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럴수록 애벌레들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밟고 밟히면서 나비가 되기 위한 경쟁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가끔 가장 꼭대기에 올라선 애벌레가 날개를 달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면 아래의 애벌레들은 그들처럼 되려고 위를 향해 한 번 더 힘을 냅니다. 나비가 될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에서 허허연栩栩然 날아다니며 장주莊周의 꿈도 꿀 수 있으련만.

 

나는 나비인가. 생명의 화원에서 꽃 향기 속을 날아다니며 그들과 놀며 꽃들의 사랑을 맺어주는 기쁜 삶을 꿈꾸었건만 나비가 되고나니, 난 나비가 아니랍니다. 그저 밤이나 되어야 날 수 있고 불빛이나 따라다니다 죽을 수도 있는 돈과 이름과 성공의 불길 속을 모험해야 하는 나는 불나방이라네요. 애벌레들은 나비를 본 적이 없어 불나방이 나비처럼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없는 날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던 거죠. 불나방 자신들도 뭔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애벌레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죠. 그러나 가끔씩 들려오는 \'내가 나비인가\'라는 내면의 자기목소리에 자기정체성의 문제를 논쟁의 주제로 삼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뭔가 그럴듯한 것이 나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논의를 하고 있다는 뿌듯함으로 나비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짜가 진짜인 것 같은 착각이었죠. 그들은 진짜를 좋아하므로 착각을 진짜로 하면 그것은 진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비라고 진짜 착각을 하는 \'1퍼센트의 진짜 가짜나비\' 가 되었습니다.

 

성안에는 불나방들의 말의 잔치와 애벌레들의 경연으로 분주했습니다. 세상의 빛이 성 안만을 비추고 있어 성 안은 항상 대낮이었습니다. 대낮의 밝음은 지각의 껍질을 점점 어둡게 했습니다. 지각의 껍질은 두꺼워지기도 했지만, 색이 짙어지면서 투명성을 잃어갔습니다. 밖이 밝을수록 안은 더욱 어두워지고 그러면서 지각의 껍질은 거울효과를 내며 들여다봐야 애벌레 세상이 비춰질 뿐이라, 세상은 모두 이런 것이라는 것이 애벌레들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밟히지 않기 위해 밟아야 하는 경쟁의 사다리를 대낮의 조명 아래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밤이 없는 성 안에서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잠을 자는 것은 곧 패배의 신호라는 호각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내 안의 소리인지. 잠이 부족한 탓인지 어디선가 들리는 \'루저를 위한 진혼곡\'은 나를 더욱 각성시키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연장시킵니다. 밤이 없으니 밤하늘의 별들을 본 기억도 가물거립니다. 애벌레들의 잠재적 힘인 프시케가 자라야 껍질을 벗고 나와 나비가 될 텐데. \'너 자신을 알라\' 애벌레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명령과 애벌레의 사다리타기 경쟁에서 이겨야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성 안의 룰은 애벌레의 성장점을 결핍이라고 막아 버리고 이긴 자들의 세상을 지속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애벌레들이 모두 나비가 되는 세상에서는 성공과 실패라는 말도 없어지므로 게임의 존재의미가 사라지겠죠. 게임을 위해 단 몇 퍼센트만이 성공할 수 있는 생존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을 사냥과 전투에 익숙한 사냥꾼의 문화적 유전자인가 집단 무의식원형인가는 여전히 없는 천적이라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해야 인간에게 할 일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가 봅니다. 그것을 삶이고 생동감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오로지 기절한 환자만 보는 의사가 모든 환자를 일단 기절시킨다는 이야기처럼 할 줄 아는 것이 싸움 밖에 없는 우리는 일단 전쟁을 하고 보는 건 아닌가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 외치며 말입니다.

 

이런 전쟁의 세상을 놀이의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 누구일까요?

이런 경쟁의 세상에서 막혀진 성장점을 열 수 있는 자 누구일까요?

이런 결핍의 세상에서 아이의 성장점을 다시 열어 진짜 나비로 키울 수 이 있는 자 누구일가요?

이런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자 누구일까요?

아이를 키우는 힘으로 이런 세상을 키울 수 있는 자 누구일까요?

 

엄마는 할 수 있습니다.

 

엄마는 생각합니다.

 

\'누가?\' 잘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가 \'잘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가 잘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