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내가 동적인 여자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언제나 덜렁대고 씩씩하고 혈기 왕성하게 돌아다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생각은 아닌데 사실은 나도 무지하게 정적인 구석이 많은 그런 여자다.
작고 작은 감동에도 눈물 찔끔하는 그런 여린 구석도 다분하고,
이쁘고 고운 포장지 하나라도 착착 접어서 소중히 두는 그런 섬세함도 있다.
길 가다가도 예쁜 구두나 앙증스런 애기 옷을 보면 쇼윈도우에 머리를 박고
유리창이 뿌옇게 되도록 혼자 넋을 뺏기기도 한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내게 행복은 그리 원대하고 무지하게 벅찬 그런 것들이 아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마당을 가로 질러서 우리집 옥상으로 올라오는 그 발길이 너무 행복하다.
석분을 사박사박 밟으며 마당을 가로 지르며 느끼는 그 홀가분함은
건강한 육신으로 노동을 마치고 난 다음의 휴식을 기다림일 것이다.
앞치마를 훌훌 벗어서 안방 한쪽에 잘 개켜둔 다음 따뜻하게 잘 데워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온수로
이런저런 먼지며 하루의 욕망찌꺼기를 씻어내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욕실 문 앞에서 날 기다려 주는 하얀고양이 철수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텔레비젼도 꺼 둔 환하고 너른 거실에는 최근에 재배치한 가구들의 신선함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늘 있던 자리에서 자리만 살짝 바꾸고 청소를 했을 뿐인데도 새로 이사한 새집 같은 기분이 들고
또한 날 행복한 여자로 만든다.
추운 겨울 늦은 오후햇살이 안방 깊숙하게 사선으로 내려 앉을 때
주방 일이 바쁘지 않으면 잠깐 쉬는 안방은 미니오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낮은 음악소리가 날 행복하게 한다.
완벽하게 혼자이고 싶은 그런 안온함이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게 하는 행복한 시간이다.
소리없이 고요히 내려앉은 장롱 위 선물상자의 먼지를 닦아내다 열어 본 상자에서
받은 날짜도 기억조차 못하는 선물들을 발견하곤 잊어버린 기억이 새로워 또 행복하다.
마치 어제 막 선물 받은 것인양 새롭고 감격스럽다.
가끔씩이긴 해도 큰딸이 보내주는 외손녀 사진이 나를 한없이 행복한 외할머니로 만들어 준다.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며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가고야 만다.
빙그레~가 아니라 벙글벙글~ 얼굴 가득 온통 잔주름 투성이의 미소가 나도 모르게 피어 오른다.
죽은듯이 납짝 엎드려 있지만 그 아래 생명을 이어갈 새싹들을 간직하는 옥상의 내 친구들이
봄이면 새 얼굴로 환하게 인사하는 그 순간은 사람인 내가 그들에게 한없이 작아지는 시간이다.
탓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모습들이 날 행복하게도 숙연하게도 만든다.
딩동~콜미맘~
악착같이 휴대폰 요금을 아끼는 둘째의 문자에
딩동~뭐하셈? 나의 애교덩어리~ㅎㅎㅎ
장난스레 보내주는 남편의 문자가 나를 웃음짓게 한다.
군에 간 막내의 사진을 해병대 훈련단에서 발견하고 건강한 모습에 안심하고 또 행복하다.
행사가 없는 날에는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느긋하게 원두커피를 내리기도 한다.
헤이즐럿 향을 조금 섞은 커피향이 거실 가득 번질 때면
이국의 이름 모를 낯선 노천카페가 생각나 작은 미소와 함께 낭만스런 여자가 되기도 한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초코케잌도 한조각 있었으면.....더 행복할 뻔 했다.
아주아주 가끔씩 들리는 시골서점에서
베스트셀러보다는 내가 꼭 읽고 싶었던 책 서너권을 사 들고 나올 여유가 있을 때
그리고 집에서 책 가장 뒷장에다가 그날 기록을 남겨 두는 그 소중한 시간이 날 행복하게 한다.
새 책의 잉크냄새와 그 속에 묻혀 있는 까만 보석같은 활자와
가슴 두근대는 미지의 내용들이 나를 잠 못들게 해도....
밤이 늦은 시각
소금끼 있는 치약으로 양치질까지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
적당하게 잘 데워진 돌침대의 온기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준다.
더 바랄게 없는 여자로..............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오늘을 행복하게 했다면
내일도 나는 행복한 여자일 것임은 분명하다.
욕망이라는 전차에만 올라 타지 않는다면.....
때로는 와일드하게 분주함을 달고 살지만 더러는 조용히 혼자이고 싶은 그런 여자로,
살아 온 날들이 살아 갈 날들보다 적음에도 전혀 서럽지 않을 자신으로 다독이며 행복을 엮는다.
가버린 시간들은 다시는 되찾을 수 없기에 오는 세월을 언제라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