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만나기 전엔 내 삶이 고단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더 화려하고 더 안락한 생활이 대접받고 산다고만 생각했었다.
깨끗한 도시에서 연일 펼쳐지는 공연과 축제를 보고 즐기지 못해서 부러웠던 적이 많았었다.
더 많이 배우지 못했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해서 안타까웠고 애가 닳았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고 온 지금 이젠 그런 유아적인 투정을 버리고 살아 가기로했다.
아니 필리핀에서 떠나오던 비행기 안에서 다는 아니라도 상당부분은 버리고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김치 한 조각
따끈한 국 한사발을 올려 놓고 밥상을 차리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무한한 행복이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간게 아니라 버스로 15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오지마을로 갔기에 인터넷은 꿈도 못꾸는 동네였다.
물론 사무실에 컴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사용료때문에 자제했다.
버스로 15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던 오지마을에
국내선 경비행기를 타고 가는 행운도 올해부터 누릴 수 있는 특혜라 했다.
작년까지만해도 버스로 그 먼 길을 달려서 도착했다고 들었다.
비행기 삯이 어마어마한 부담이다보니 작년까지만해도 육로를 이용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폐차 수준인 그들의 버스를 타고 15시간을 비포장도로를 달리다보면
엉덩이가 얼얼하고 먼지를 먹고 뒤집어쓰고 귀까지 먹먹해진다고 했다.
버스에서 볼일을 해결했다니 상상도 안된다.
아니면 달리다가 멈춰서서 길 가 아무데서나 해결하고.
온 벌판이 다 화장실인 셈이다.
그들은 너무나 익숙한데 선교사님들이나 방문자들은 가장 큰 고역이라 했다.
인구가 1억이 넘는다는 필리핀
정확한 인구조사를 더 해봐야알겠지만 내 생각엔 그들의 인구는 1억이 훨씬 넘을 것 같았다.
7000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에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했다.
극소수의 부유층이 7000개가 넘는 그 넓은 섬나라를 움직이고 있었다.
50~60년 전에는 한국보다 더 잘 살았다던 필리핀
그러나 지금은 마닐라에서만 그런 흔적이 있고 오지마을에는 원주민 수준의 사람들이
나뭇잎으로 엮은 집에서 소나 닭 돼지와 냄새를 공유하면서 살고 있었다.
골목골목 아이들이 넘쳐났고 엄마들이 어렸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 쯤 돼 보이던 아기엄마들이 많았다.
직장도 구하기 어려웠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도 벅찬 노임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극소수의 지도층과 부유한 사람들이 마닐라를 비롯한 휴양도시를 거의 다 소유하고 살면서
7할이 넘는 인구들을 잘 돌보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부촌에서는 아예 철조망까지 쳐 두고 가난한 사람들의 출입까지 제한한다고 했다.
수억에서 수십억의 외제 자동차를 서너대씩도 소유한다고 했다.
큰 건물들마다 무장한 경비들이 늘 보초를 서고 있었다.
국내선 공항에서는 작은 트집을 잡아 물건을 반입하지 못하게 하다가도 돈만 주면 만사오케이~
그래서 그들은 터질듯이 살이 뚱뚱하게 쪄 있었고 얼굴에는 비열한 웃음이 번들거렸다.
마닐라 국제선 비행장에서는 입국절차가 거북이도 할아버지 거북이보다 더 느려터졌다.
한국 공항의 스무배도 넘게 기다려서 입국절차가 완료되던 그 무한정의 기다림
그래도 그들은 저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한테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나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개미발바닥의 먼지 알갱이만큼도 없었다.
시골마을에서는 거리마다 오물이나 흙탕물이 넘쳐났다.
우리가 간 곳들은 배수시설이 열악한 시골들이라 비만 오면 물 웅덩이가 곳곳에 패여 있었다.
그런 길을 발가락만 끼우는 샌들을 신고 질퍽거리며 다녔고
개나 사람이나 먹는게 부실해서인지 모두가 작은 체구였다.
관광객이 다니는 길에서는 어디든지 꼬맹이들이 벌떼같이 몰려 들었다.
자기 작은 배를 두드리면서 \"원 달러\"를 외치던 아이들.
남편의 주머니에 손을 잽싸게 집어 넣던 아마추어 소매치기.
가짜 진주목걸이를 수만원에 팔다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5세트를 차창 안으로 집어 넣어버리고
유리창이 부서져라 만원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 오던 아이들......
늦은 밤시간에도 거리에는 아이들이 넘쳐났다.
집에 가 봐야 이야기를 들어 줄 부모도 같이 놀아 줄 부모도 tv도 없는 아이들은
낯선 나라의 후원자들이 왔다는 소문에 몇날 며칠이라도 그렇게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꼭두새벽에도 닭들과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알람이 따로 필요치 않았다.
눈만 마주치면 원달러를 외치며 옷을 잡아끌고 ......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래도 염치가 좀 있었다.
깍듯이 인사를 잘 했고 누굴 붙들고 구걸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짐들을 들어 올려 주고 내려 주면서도 아무것도 원치 않았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교육과 치료까지 다 해 주는 교회가 하는 일에는 그들도 고맙게 봉사할 줄도 알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과 공손한 말씨
선하디 선한 그들의 눈빛이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인구 중 얼마 안되는 극소수의 부유층들이 다 가져가 버린 그들의 부와 혜택은
얼마나 더 그들을 버려진 국민처럼 그렇게 살게 방치 하려는지.....
마닐라에서는 깨끗한 거리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고층 빌딩에 호텔이 즐비했다.
우리나라 청담동쯤 돼 보이던 화려한 거리에서는 젊은애들이 고급명품에 고급음식점이나
스타벅스 커피점에 앉아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오지든 마닐라든 특이한건 우리나라 골목골목마다 다 있는 모텔이란게 안 보였다.
성적으로 많이 문란하다고 들은 필리핀에 모텔이 없다는 건 참 의외였다.
마닐라에서조차 치안이 불안하고 관광객들은 혼자서 나다니는 밤거리를 조심하라고 했다.
장총을 가진 경찰들이 거리 곳곳에 보초를 서 있었고 그 모습이 오히려 불안감을 더 고조시켰다.
임금은 낮고 물가는 엄청 비싼 나라 필리핀
파출부가 하루 일해서 통닭 한마리도 못 시켜 먹을 정도의 임금이라니....
채소값이 너무 비싸 호텔에서조차 흔치 않았던 채소반찬이었다.
물론 고급 호텔에 갔더라면 사정은 달랐겠지만 선교여행이다보니....
몇십년 전만해도 부자나라였다던 필리핀이 지도자를 잘못 만나 저 지경이 됐는데도
그 지도자는 바뀌어도 그때 누리고 살았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바꿀 생각을 안하고 있다니 참....
이멜다가 4400 켤레의 구두에서 조금만 덜 샀더라면 어땠을까?
해외 나들이에서 값비싼 보석이나 명품 옷들을 백화점을 홀라당 다 털 듯이 사지만 않았더라도...
필리핀을 도탄에 빠지게 했던 이멜다가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오고 빼 돌렸던 돈을 국고에 다 넣었을까?
어떻게 용케 살아있네.
국외로 쫒겨났다던 이멜다가 국내로 들어오고 그 아들이 정치를 한다니 필리핀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그 너른 땅덩어리를 살기 좋게 만든다면 섬나라가 국제적인 휴양도시가 되겠구만 안타깝다.
세부나 보라카이 같은 휴양도시가 있긴 하지만 섬이 몇갠데~~
3부작이 된다는 나라에 거의 놀고 있던 그 너르디 너른 땅들....
일부에서만 벼 농사를 짓고 거의 다 놀고있던 땅이 너무 아까웠다.
풀~풀~날아갈 듯한 밥알이 신기했고 이상한 향이 짙은 그들의 음식은 정말 먹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이민 가방에 바리바리 가져간 김치며 잡채거리 늙은호박에 김밥재료들로 동네잔치를 했다.
잔치 당일 끼약~~~
거리가 새카맣도록 몰려 든 사람들 .
2주된 갓난쟁이도 안고 나온 철부지 산모도 여럿 있었다.`
출산의 축복은 있었지만 다른 축복은 글쎄????
오나가나 일복 터진 이 사람.ㅎㅎㅎ
그들의 주방을 접수하다.ㅋㅋㅋ
내일쯤 아들이 오면 사진은 올리고 재미난 에피소드는 다음에...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