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베고니아가 꽃망울을 밀어내고 있다. 그러더니 지금은 제법
푸른 잎새 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게 보인다.
지난 7월 마지막 꽃들이 시든 이후 곁가지를 따서 다시 꽂아놓았었는데 그게 쑥쑥
자라 어느 새 꽃망울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큼 시간이 훌쩍 가버린 걸까. 그러고 보니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있다.
3개월이라는 시간으로도 꽃을 피워내기에 충분하구나! 몇 년이 지나야 피는 꽃도
있는데, 꽃이 핀다는 걸 잊을 만큼 인색한 꽃들도 있는데, 넌 가지를 꺾어서
꽂아놓을 뿐인데도 단 몇 개월 만에 자신을 완성해내는구나! 꽃이 잡스럽거나
조잡하지도 않은데.
처음 삐죽 얼굴을 내밀 때만 해도 부끄럼타는 수줍은 아이 같다.
헌데 꽃대가 올라오면서 꽃들이 하나하나 보태지고 포도송이처럼 탐스러워질 때면
수줍음 같은 건 달아나고 없다. 활짝 피어 제 속살도 죄다 보여준다.
그때쯤이면 붉은색이 푸른 잎새 위에서 철철 넘쳐난다. 꼭 붉은색 물줄기가 푸른
바위위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송이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색 꽃은 집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기분전환이
된다. 아낌없이 뿜어내는 밝고 화사한 기운이 와 닿는 순간 내 마음은 구름이
끼었다가도 밝아진다.
요즘 난 햇살이 찰랑찰랑한 한낮에도 추위를 잘 타는 이 녀석을 위해 서재의 창문을
거의 닫아놓고 산다. 기온이 낮다 싶으면 녀석이 바짝 웅크리고 맥을 못 추기
때문이다. 옷을 껴입은 난 11월까지도 햇살이 찰랑거리는 날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데 말이다. 내겐 상큼하고 신선한 공기가 추위를 잘 타는 녀석에겐 고통이 아닐
수 없나보다. 그래서 올해는 베고니아 화분을 서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서재를
제외한 다른 실은 여전히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베고니아에 쏟는 내 마음이다.
베고니아가 추위로 움츠러드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베고니아를 잃고 싶지도 않다.
추위를 잘 타는 이 녀석과 만난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어간다. 녀석과의 만남도 참
남달랐다.
몇 년 전 동생집에 갔을 때였다. 거실에 정신없이 늘어진 베고니아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정리 좀 해주지. 꼭 죽을 날을 받아둔 채 시름시름 앓고 있는
환자 같다는 생각이 다가왔다. 그 순간 왠지 살리고 싶다는 욕구가 들어왔다.
난 이리저리 흩어진 줄기에서 성성한 가지 몇 개를 따냈다. 그리고 나머지 줄기는
버린 후 흙을 고르고 따낸 가지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꽂아놓았다. 그렇게 해야
산다는 확신은 없었다. 헌데 왠지 그렇게 해야 살 거 같았다.
그건 순전히 내 느낌으로 치러진 작업이었다.
화분에 꽂아놓고도 두어 개가 남았다. 난 그걸 가져다 심겠다며 물에 담가놓았다가
집으로 오던 날 가져왔다. 그렇게 동생집에 있던 베고니아가 내 집으로 분양돼 왔다.
화분에 가져온 걸 꽂아놓고 정성스레 물을 주었다. 꽃은 시드는 기색도 없이 윤기를
내며 잎을 피워냈다. 얼마 지나자 꽃망울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랬던 베고니아가 이듬해 1월 어느 날부터 시들시들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녀석이 왜 생기를 잃어가는지 잘 알지 못했다. 베고니아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없는 상태였다.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죽어가는 녀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만은 가득했다. 화분을 거실로 들였다.
그런데도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잎새까지 완전히 시들어버리고 줄기도
썩어 잘려나갔다. 그렇게 되자 나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단번에 싹둑 잘려나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모르니까 하는
마음으로 간간히 물주는 것은 여전히 계속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어느 날 흙속에서
삐죽이 뭔가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베고니아 싹이었다. 그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렇게 나온 싹 하나가 그 해 4월엔 꽃을 피워냈다. 그게 베고니아꽃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부터 난 꽃이 지면 곁가지들을 따낸 후 다시 화분에 심는 일을 해마다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 베고니아는 지금처럼 10월 이 때쯤이면 꽃망울을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6~7월까지는 피고지고하면서 내 집을 화사하게 해준다.
난 이참에 그런 녀석에게 덕담이라도 해주고 싶다. 녀석으로 인해 다가온 흐뭇함을
돌려주고 싶어서다.
‘21세기 10월 내 집 서재에서 알토란 같은 꿈을 키우고 있는 베고니아여,
탱글탱글 영근 니 꿈을 맘껏 피워내렴! -너의 주인이 베고니아 널 보면서-’
그리고 내 집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전한다.
녀석도 알아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