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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기 힘든 가을걷이병


BY 이안 2011-10-21

난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시장만 가면 마음이 붕붕 뜬다.

눈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특히 감자나 양파, 매실 등이 나오는 6~7월이나

요즘 같은 가을걷이를 하는 때면 더더욱 그렇다.

 

통통한 밤을 보면 보관의 어려움은 싹 달아난다. 눈길이 그곳에 머물러 쉬 떠나지를

못한다. 이미 몇 번이나 끝까지 그 마음을 밀어내지 못하고 샀다가 벌레 먹어서,

보관을 제대로 못해 썩어서 버려야 했던 적이 있다는 것은 아랑곳없다.

통통한 밤들이 담겨있는 밤자루에서 시선은 떠나지를 못한다.

 

고구마를 보면서 그것도 걷어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호박고구마를 구워서

껍질을 벗겨냈을 때의 노르스름한 색이 눈앞을 왔다갔다한다.

달착지근한 맛도 입안에 달라붙어 침을 고이게 한다.

애써 밀어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고구마 대신 내가 더 좋아하는 홍시를 구입해

저장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당글당글한 무 묶음이 눈에 들어온다. 입맛을 자극하는 새콤해진 무김치가

떠오른다. 그리고 한편에선 무청시래기를 하면 딱이라는 생각이 다가온다.

싱싱한 무청들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진 곳에 축축 걸어 바삭바삭 말려놨다가

물에 불린 후 볶음을 해 먹거나 찌개를 할 때 넣어서 먹으면 그 맛 또한 새콤한

무김치 못지않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요리를 아주 잘하는 사람처럼 남들이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다가온다. 하지만 난 끼니만큼은 굶지 않는 꼬박꼬박이면서도 요리를 군침

넘어가게 잘하지는 못한다. 설탕이나 조미료에 거부감을 갖다보니 어떤 땐 쓴맛이

나기도 할 때가 있다. 게다가 요리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먹는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하는 그런 정도일 뿐이다.

 

결국 나는 가판대에 올려진 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나에 천원이라는

무 네 개를 고른다. 그러면서 무주인한테 말한다.

 

아줌마, 무청 있으면 좀 넣어주시면 안 되나요?”

 

무주인은 말없이 푸른 봉지를 꺼내 내가 골라놓은 무를 주섬주섬 담는다.

 

아줌마, 잘라놓은 무청 없어요?”

 

나는 한 번 더 묻는다. 그랬더니 주인 여자가 베시시 웃으면서 말한다.

 

넣어주려고 큰 봉지에 담고 있어.”

 

그 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오천 원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가판대에서

무 하나를 다시 고른다.

 

하나 더 살게요. 이것도 넣어주세요.”

 

나는 고른 무를 여자에게 건넨다. 그랬더니 주인 여자도 웃으며,

하나 더 샀으니 나도 하나 더 줄까?” 하면서 무청 묶음을 가판대 밑에서 꺼내

더 넣어주신다.

 

나도 흐뭇해진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지갑을 열고 그녀에게 돈을 건넨다.

팔에 느껴지는 무의 무거움도 거뜬히 참아낸다.

 

시장을 골목골목 누비며 시선을 주고 밀어내고 하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돌아온다.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던 스트레스가 일거에 사라진다. 가을걷이 욕구가

병적 수준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린 끝에 시장가는 횟수를 줄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후 열흘 만에 오는 시장이었다. 그러자니 마음에 압박감이 쌓이는 것을

참아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참겠는데 간간히 간식으로 먹을 과일이

없다는 게 그렇게 고통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핑계거리를 들어 스스로의 결단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볼 수가 없어 참고 참아냈다. 그 압박감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 압박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물밀 듯 다가왔다. 그래서 이번엔

열흘 먹을 걸 생각하고 과일만큼은 충분히 구입을 했다.

 

집에 돌아와 사가지고 온 것들을 냉동실로 냉장실로 보낸다. 그리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꼭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다람쥐같다. 그러고 보면 가을걷이는 내게

겨우살이 준비나 다름없다. 겨울이면 썰렁해져 마트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안타까움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농사꾼 부모에게서 태어나 보고 자라 것이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가 보다. 그래서 내 눈이 굴러다니는 것도 막을 수가 없다.

 

이러니 내 가을걷이병은 고쳐질 가망이 없어 보인다. 한 번 시장에 올 때마다 쓸

액수도 정해놨지만 내가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은근히 저장용

장거리들을 구입할 때는 어쩌지 하는 걱정이 다가온다. 그래서 이번엔 저장용

장거리들을 구입할 때만큼은 한도를 초과하더라도 봐주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랬더니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

 

 

그랬더니 생각이 세상은 서로서로 봐주면서 살아가는 것인데라는 말에 가서 머문다.

나를 봐줬더니 내 마음이 가벼워지듯 남을 봐줬을 때 마음이 가벼워 지는 것 역시 

당연지사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말은 앞서 살면서 깨우침을 얻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살면서 몇 번쯤은 떠올리기도 하는 말이다.

헌데 그 생각 끝에 씁쓸함이 끌려온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봐주면서

사는 게 쉽지가 않다. 자신한테 관대한 만큼 다른 사람한테도 관대한 사람이 드물다.

나 자신부터 자신이 없다. 나도 모르게 좁아지는 내 소견을 내가 어찌

다 감당하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별거 아닌 것들을 실천하면 사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큰 욕심보다도 사소한 욕심을 다스리기가 더 어려운 거 같다.

큰 욕심은 아주 드물게 다가오고, 다가오더라고 그 무게 때문에 붙들고 씨름하는

사이 다스려질 수 있겠지만, 사소한 욕심들은 늘상 있는 일들이어서 무심하게

대하는 사이 생체기를 내고 달아나기 일쑤니 말이다.

그래도 이젠 그런 욕심들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고 애써 나를 채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