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 속에서 올것 같지 않던 가을이 갑자기 성큼 다가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느끼는 세월의 무상함은 변함없이 찾아든다.
늙어가는구나.. 계절의 변화 앞에서 늘 그런 상념에 잠기곤 한다.
다시 언니의 호출을 받았다.
\"집 구하러 가는데 함께 좀 가자.\"
나는 또 원고를 닫는다.
이번 소설은 고지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너무 여러번의 도중하차가 있었다.
언니네 아파트를 계약하고 의논을 받아준다.
남의 일에 앞장 선 후에 당하는 낭패를 경헙했지만 또 앞장을 서게 되니 기억상실인 모양이다.
이사를 위한 물건 정리에 바쁜 나날을 언니와 함께 보낸다.
물건이란 추억임은 사실이다.
어떤 상태에서 구입을 했으며 누구에게 선물을 받았는가 하는 추억이 있다.
\"이거 버려?\"
하루 종일 언니가 내게 묻는다.
혼자서는 결정을 하지 못하는 언니를 바라보며 웃는다.
왜 자신의 물건을 버리는 일에 동생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지 의아하다.
혼자서 결정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늙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언니가 나보다 소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물건인양 나는 대답한다.
함께 우왕좌왕해서는 안된다. 하나가 소심하면 하나는 과감해야한다.
\"응. 버려.\"
\"이거 비싸게 산 옷이야.\"
\"그래도 버려. 유행이 너무 지났어.\"
\"네가 유행을 그렇게 잘 알아?\"
\"잘 알아. 버려.\"
\"알았어.\"
유행을 잘 아는것은 아니지만 자극적인 말이 미련을 버리는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한다.
아무짝에도 필요없는 미련.. 나는 미련이라는 단어가 싫다.
언니에게 안어울린다던가 촌스럽다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많은 옷이 비닐 봉투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버려.\"
우리가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며 많은 물건이 필요한것인지 모르겠다.
사계절 탓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이유를 찾는다.
허나 이제 우리 나이는 어떤 것도 아까워 해서는 안되고 어느 것에도 연연해서는 안된다.
이사가 아니더라도 정리를 해야하는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에 대한 정리다.
언제고 훌훌 떠날수 있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
말소해야 하는 추억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껴안고 가기에는 우리에게 처한 현실이 급박하다.
감당할수 없는 것은 버려야만 한다.
내게는 스물다섯살에서 육십사세까지의 사진이 한장도 없다.
결혼생활 삼십구년이 말소된 것이다.
사진을 보며 이 시절은 좋았다는 되새김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옥 속에서도 좋은 시절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 시절을 그리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자를 것은 잘라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움이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년 삼월이면 나도 오산을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갈까.
어쩌면 아주 먼 곳으로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것을 정리하고 그 어떤 것도 새로 시작하지는 말자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