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서평 ]
『시앗 1, 2』로 수많은 ‘아내’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한 남자 두 집』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작가 정희경이 이 봄 한층 고양된 모습으로 새 책을 내놓았다. “21세기는 여인이 많은 남자들을 보내는 시대이다”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렇게 여인은 남는다”라는 의미심장한 여운으로 끝을 맺고 있다.
『레퀴엠의 여인』의 작가는 왜 여자가 아닌 여인(女人)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여자와 여인은 다른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자가 곧 여인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가벼운 존재로서의 행태일 뿐이다. 여자는 인간 중에서 남자 아닌 인간을 의미한다. 즉 그렇게 타고난 존재이다. 특히 한국에서 여자로서의 삶은 타고난 존재인 만큼 수동적인 것이 현실이다.
여자는 자식을 낳는 순간 누군가의 딸에서 누군가의 어머니로 변신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것이 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직접 출산을 해 봄으로써 자식을 얻는 행복이 너무나 큰 고통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 시점이 딸이 엄마가 되는 순간이다. 그때의 시간이란 딸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행복과 책임을 경험하게 되는 소중한 경계점이다. 딸과 엄마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골동품 같은 정의인데, 그렇다면 여자가 여인이 되는 시점도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자는 자식을 낳음으로서 여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출산은 여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인의 존재감은 자식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불필요하고, 성가시고, 상처를 주고, 원망을 주고, 아쉬움을 주면서 가끔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인 남편에 의해서 여자에서 여인으로의 존재적 변신을 하게 된다. 그냥 남편을 가지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남편이 죽음으로써 진정한 여인으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의 여인은 삶을 돌아볼 줄 알며, 삶을 내다볼 줄 알며, 죽은 남편에 대해 원망과 애정을 정리할 줄 알게 된다. 보통 이 상황을 한국에서는 50대의 여자가 겪게 된다. 30대, 40대의 여자도 이런 상황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확률이 낮으며, 그들의 경우 과거보다 미래가 더 크게 남아 있으므로 이러한 운명적 순간을 경험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50대보다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60대는 어떠한가? 과거가 미래보다 크게 다가와서 회상적 여자로 마감할 확률이 높다. 50의 숫자를 가진 여자는 여인을 내포하고 있는 유일한 독점자이다.
『레퀴엠의 여인』은 바로 이런 50의 숫자를 가진 여인의 이야기이다. 20여년의 결혼생활에서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이 이혼 그리고 자신과 관계되었던 여러 남자들의 죽음과 마지막으로 이혼한 남편의 죽음을 마주보면서 여인으로 남게 된다. 한국의 50대 여인들의 성찰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끝내는 커피원두를 씹는 맛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20대의 여자들은 이 책을 볼 필요가 없다. 어쩌면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은 벌써부터 그런 상황을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30대부터 조금씩 맛을 보며, 40대에서 맛과 향을 되새기고 50이라는 숫자로 진입하면 되는 것이다. 혹시 놓칠지 모르는 50대의 여자들에게도 좋은 작품이다. 60대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 주위 소문으로만 접해도 좋을 듯 하다. 30, 40, 50의 숫자에 걸쳐있는 한국의 여자들은 자기성찰적 독서를 해 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