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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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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는 엄마를 두번 죽이는 것이다.


BY 그대향기 2011-02-04

 

 

명절이나 다른 일로 친정엘 가게 되면 가장 안타까운 일이 엄마를 만나는 일이다.

평소에는 마음으로만 그리워하고 안아드리고 싶은 엄마였다가도

막상 만나고보면 마음은  더 아파지고 언제쯤 이 고통에서 해방되실건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소릴 지른다든지 대문 밖으로 튀쳐나가시는 일은 없지만

가족과의 대화 도중에 뜬금없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고

모시고 사는 막내올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발설로 아연실색케 하신다.

 

지금 현재의 이야기보다 아련한 옛 이야기로 혼자 추억 속을 여행하시는 엄마.

우리 아이들도 가끔 혼돈하신다.

많지도 않은 외손주들을.....

멀쩡하게 식사하시다가 공연히 이상한 이야기로 식사 분위기 흐려뜨리시고

자꾸만 누굴 의심하시는데 옆에서 지켜보기가 민망스럽다.

난 그래도 딸이라 엄마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보듬으려 애쓰지만

매일 당하는 올켄 많이 힘들어했다.

오빠 역시 마찬가지.

 

명절 음식을 가족이 먹어서 없이지는데도 자꾸만 올케를 의심하니 참....

뭘 드시는 정도는 아직 양호하신 편이고 소화 능력까지 다 그만하신데

오직 정신력에서 많이 약해지셔서 큰일이다.

본인의 의지하고는 무관하게 나빠지신 것이라 더 안타깝기만 하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겠지만.

엄마는 더 건강하게 보다는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좋겠다.

엄마가 걸어 오신 힘겨웠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시단 생각이 든다.

같은 여자의 인생에서 뒤 돌아 보면 엄마는 너무 억울하시다.

 

해상무역을 하시던 외갓댁의 부잣집 둘째 딸로 태어나셨지만 외할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물건대금이나 빌려준 거금은 못 받고 빌어 온 돈만 갚아야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었다고 하셨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와 결혼하시고도 꽤 많은 지참금을 가지셨지만

아버지의 군기피로 몇년동안 만주까지 도피생활을 하시면서 위로 두 아들까지 잃으셨고 

비단 이불에 숨겨뒀던 비상금과 속바지에 누볐던 전재산도 다 잃으셨다고 했다.

만주에 도망갔다 와서는 전답과 가옥까지 몰수당하시고....

아버지의 나약한 가장의 모습은 엄마를 생업전선에 나서게 하셨다.

 

아버지의 염세주의적인 자아도피는 날마다 술독에 빠지게 하셨고

자식들의 배움도 쌀독에 최소한의 식량도 없는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엄마는 5남매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고

곱디 곱게 자란 엄마의 상실감과 수치심은 일찌감치 내 동댕이 친 다음이라 하셨다.

오로지 내새끼들 배 안 굶기고 남의 처마 밑에서 비 맞게 안 하시려고

엄마는 작은 체구로 남의 집 담을 넘는 일과 화냥질 빼고는 다 하셨다고 했다.

무능한 남편을 의지하고 기다리는 일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어린 자식들이 더 소중했던 엄마.

그런 엄마였기에 우리 5남매 아무도 안 버리셨고 보듬어 키우셨던 엄마.

 

며칠 전에는 아흔이 넘으신 엄마의 올케 나에겐 큰 외숙모되시는 분이

엄마를 찾아오셨는데 그 외숙모님은 아직도 정정하셨단다.

엄마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시곤 그 곱던 엄마가 온 얼굴이며 팔다리엔 검버섯이 거뭇거뭇하고

거동조차 불편하신 걸 보시곤 같이 펑펑 우셨다고 했다.

그 외숙모님댁은 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이긴 했지만 외숙모님네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안 밟으면

마을 길로 못 들어선다고들 하기도 했다.

대문에서 방까지 걸어들어가는 마당은 어린 발걸음이라 그랬는지 학교 운동장 만했고...ㅎㅎㅎ

엄마도 만주에서 잃어버리셨던 그 재산 다 유지하고 사셨더라면

그렇게 살았을거라며  오랫만에 만난 늙은 시누올케 두분이서 실컷 우셨단다.

 

그런 엄마가 이젠 조금씩 우리 곁을 떠날 채비를 하신다.

날마다 멀리 사는 딸이 그리워 골목길을 서성이신다던 엄마가

이제는 그 골목길에도 못 나서실 정도로 기력이 떨어지셨다.

귀하게 자랐던 그 옛날의 기억을 애써 지우시려고 어린 우리 남매들이

방학 때 외갓댁에 놀러라도 가려고 하면 가지말라고 말리시기도 했다.

외삼촌이나 외숙모님들한테 우리 남매들이 업수임을 당하고 서운해 할까 봐.

그래도 해마다 방학만 돌아오면 우린 외갓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우리 또래의 사촌들하고 드 넓은 외갓댁 논밭에서 공차기며 재기차기를 하는 재미를

어찌 어른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잃을 수 있었으랴.....

 

엄마는 가끔 통이 큰 여자이기도 하셨다.

내가 이런 저런 계산법으로 마음 졸일 때 엄마는 대범하게 일침을 주기도 하셨고

맨몸으로 만주에서 돌아 와 오로지 엄마의 노력으로 일구셨던 잃어버린 옛 재산이며

수천평 노른자위 부동산을 고스란히 우리 5남매한테 못 물려 주신걸 애석해 하셨다.

매사에 분명하고 길게 생각하셨던 엄마가 이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전전긍긍하신다.

없는 세상을 혼자 보시고 혼자 고통을 당하신다.

잠꼬대같은 이야기를 혼자 늘어 놓으시며 가끔 들리는 딸한테 애기보채시듯 들어 주길 바라신다.

한두번 들어 드리는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날마다 당하는 오빠내외가 힘들어 한다.

 

엄만 숨이 끊어져서 죽음인게 아니라 이미 예비 죽음을 당하신 듯 하다.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본인의 의지대로 생각하지도 못하신다.

살아계시다는 생물학적인 증거만 있을 뿐

엄마는 이미 조금씩.....여러가지로 죽음을 체험하고 계신다.

올해 여든 여덟의 엄마.

결코 적은 연세는 아니시지만 엄마가 온전한 정신으로 계시다가 가셨으면 ...

힘겨웠던 엄마의 인생을 미화하기엔 엄마의 희생이 너무 크지만

그래도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 엄마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또렷하게  완전한 기억으로 가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