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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연재3) - 여자가 행복할 수 있는 길, 남자가 행복할 수 있는 길


BY 사랑의 빛 2010-08-19

여자가 행복할 수 있는 길, 남자가 행복할 수 있는 길  

  

   

남자들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불어야 합니다. 한 번 불고, 두 번 불고, 세 번 불어서 하나의 담을 넘어뜨리고, 두 개의 담을 넘어뜨렸다는 그것을 갖고 다니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빈손으로, 그리고 쉼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자는 형체없이 자유로운 바람이 되어 계속해서 불어야 합니다. 불었다는 사실로 인해 나타난 현상,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쥐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 번 현상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거기에서 혼선이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세심히 관찰해 보세요. 역사상 위대했던 사람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많은 부를 건설했던 재벌들, 그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대는 그들의 성공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거나, 혹은 타고나길 잘 타고났거나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항상 문제에 맞서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것이 골치 아프고 피곤한 노릇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어 부딪쳐 나갔고, 조그만 성공에 만족하여 거기에 안주하는 법 없이 끊임없이 불고 또 불었습니다. 바깥에서 보게 되면, 그들은 성공이라는 안락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그 성공을 즐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편안함을 즐기는 사람이 성공한 예는 없었습니다.

  그대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은 그대가 성공하여 편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편하고 행복하려고 하는 한, 성공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대는 편안해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편안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멈추어져 있는 채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삼라만상이 모두가 다 바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쁜 움직임 속에서야말로 참된 평안이 얻어집니다.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어떤 재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아주 커다란 고층 빌딩만 5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그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의 풍요로운 부富와, 그 속에서의 편안한 삶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벌은 결코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편안하지 못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빌딩도 섰고, 우리의 경제적 안정도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편안히 쉬십시오.”

그래도 그는 쉬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 말을 듣고 거기에서 쉰다면 그는 결코 재벌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멈출 것입니다. 멈추어서 쉬다 보면 어느새 그가 구축해 놓은 부의 세계는 연기처럼 대기 속으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금 그대에게 재벌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터득하려는 삶, 즉 자신의 생명력을 꽃피워 내고, 그 꽃피움으로 모든 만물을 풍요롭게 누리고 가꿀 수 있는 원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생명력을 펼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나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생각합니다.

‘내가 어느 벽을 허물어야 보다 더 폼이 멋질까? 어느 벽을 허물어야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까? 어느 벽을 허물어야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대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벽을 찾기 때문에 벽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허물어야 할 벽을 찾지 못하고 헛되이 세월만을 허비하면서 자신의 생명력을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벌은 중도에서 쉬지 않았습니다. 그는 쉼없이 일했습니다. 회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전 사원의 일을 했습니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고민하며, 심사숙고하며, 자기의 전체를 쏟았습니다. 그는 이미 수없이 많은 벽을 통과해 왔기 때문에, 이미 바람의 능력을 터득했기 때문에, ‘나는 나무는 잘라 본 적이 없으니 가위로 오릴 종이를 다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벽이든지 틈만 있으면 파고 들어가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리 강하고 두터운 벽을 만나더라도 그 순간 어느 부분이 약한 부분이며, 넘어뜨리기 용이한 부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 부분이 필요하고, 어느 부분이 불필요한 부분인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또한 어디에서 손을 떼어야 하는지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습니다. 그는 어떤 사업이 상업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하는 그 요소 요소를 다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력의 삶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벽을 무너뜨림에 있어서,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마저 놓아버린, 붐 없이 부는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평화의 안식처인 깔리는 그 지나는 바람 속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쉬바는 곧 깔리 속을 흐르는 쫀득쫀득한 흐름이었으며, 또한 깔리의 연결된 고리였던 것입니다. 쉬바의 힘이란 결국 깔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하나의 물방울이 갖는 구심력, 그것이 바로 물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원심력은 구심력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나고, 진정한 구심력의 완성은 바로 원심력으로부터 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쉬바는 깔리로부터 생겨났으며, 쉬바의 흐름은 결국 커다란 깔리의 완성인 것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먼저 열심히 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꾸만 움켜쥐려는 손을 털고, 안주해 주저앉으려는 몸뚱이를 일으켜서 끊임없이 불어가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대는 ‘성공하는 비결’이라든지 ‘인간 처세학’ 등의 타이틀이 붙은 책을 따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하는 데는 비결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성공하기 위한 처세를 연구한 학이라는 것을 공부해서 성공한 예는 일찍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그대를 더욱더 작은 좁쌀로 만들 뿐입니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덩어리들은 보다 더 큰 덩어리 속으로 삼투된다는 사실을. 한 바가지의 물을 떠놓고 거기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얼마 안 있어서 그 잉크는 한 바가지의 물에 흡수되면서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반대로, 한 바가지의 잉크 속에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린다면 그 물방울은 곧 잉크 속으로 흡수되면서 물의 투명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빨려들어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 때는 저절로 다른 여러 가지의 것들이 바람 안으로 딸려 들어오게 됩니다. 강하게 부는 바람일수록 더욱 많은 것들이 휘말려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바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쉬어서 지금 이 속에 빨려들어 온 것들을 가지고 행복한 세계를 즐겨야 되겠다.’라고 한다면, 그리해서 불던 바람을 멈추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빨려 들어왔던 것들은 다른 큰 바람줄기에 의해 흩어지고 빼앗겨 버리게 될 입니다.

 

남자는 끊임없이 흐르는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자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에게 쉬바적인 힘과 깔리적인 힘을 조화시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터득시켜 주어야 합니다. ‘내 아들이 학교에 가서 일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등을 하고 우승을 할 수 있는 그 힘, 그 힘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수 있는 그 제3의 재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붙어 느껴오는 감촉이 곧 불변하는 행복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빨판을 대상으로부터 거두어 둥근 공처럼 만들었을 때, 그 때 깔리는 쉬바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결국 물줄기는 물방울이었으며, 물방울은 물줄기가 줄기로 되어 흐를 수 있게 하는 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즉 깔리는 물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줄기가 되어 흐를 수 있게 하는, 물방울이 가진 구심력이었으며, 쉬바는 흐름으로써 물이 물로써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원심력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스스로의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머니적인 능력을 통하여, 어디에 가든지 끊임없는 흐름을 통해 행복이 영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끊임없는 흐름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움켜쥐려는 깔리만의 속성을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녀가 만들어내는 행복의 자장磁場 안으로 끌려 들어와 그 행복을 스스로 증폭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 달라붙어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고 행복해하는 그런 기생적인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가 하나의 독립된 행복의 성의 성주가 되어 어디엘 가든지 그곳을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지금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는 그 자리를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를 또다시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와 동일시하게 되면서부터 그것의 노예가 되고, 그 대상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날 다시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브라흐마차리아(brahmacharia, 성의 초월)란 바로 바깥 대상을 향해서 자기의 힘을 내펼치려고 하던 남성의 쉬바적 에너지가 그 만남의 결과를 자기 속에서 발견하고, 그리고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여성의 깔리적 에너지가 곧 쉬바의 움직일 수 있는 힘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쉬바와 깔리의 에너지가 공존하여 나타나는 우주의 작은 이름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남자는 언제나 자기의 힘을 내어 쏟을 대상을 찾아서 바람처럼 헤매던 것을 그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쉬바적 에너지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가꾸게 되고, 여자는 자기가 달라붙으려던 대상에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기 안에 어느 누구든지 와서 편히 쉴 수 있고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커다란 행복의 빈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부의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신비한 내면의 대지에 깊이 뿌리박은 한 그루의 거목이 될 때, 거기가 바로 모든 만물이 함께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파라다이스요 천국인 것입니다.

 

쉬바는 쉬바대로, 깔리는 깔리대로 따로 움직이는 그것을 자기라고 고집하게 되면, 그대는 스스로가 선택한 윤회라는 끝없는 방황의 길에서 영원히 고달프고 안타까운 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쉬바는 끊임없이 깔리를 찾아 헤매나 영원히 자기가 안주할 곳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을 기웃거리면서 유령처럼 헤매게 될 것이고, 깔리는 또한 끊임없이 자기가 달라붙어 기생할 대상을 찾아 헤매나 정작 영원히 만족할 만한 의지처를 결코 외부에서부터는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가 붙어 있는 쉬바의 바람기에 의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노예적인 삶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쉬바는 깔리를, 깔리는 쉬바를 오직 자기의 내부에서만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쉬바는 깔리가 갈 길이고, 깔리는 곧 쉬바가 머물러 쉴 곳입니다. 그대는 외면상의 반쪽만의 삶을 과감히 벗어나서 쉬바와 깔리를 자기 안에서 만남으로써 그 둘이 엮어내는 조화를 터득하여 이 땅 위에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파라다이스를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