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라면을 ‘라~맹’이라고 했다.
우스꽝스러운 라~맹이라는 발음을 예사로 듣던 어린 봉자는 사람이 늙으면 말(言)도 따라 늙는 줄 알았다.
학교를 ‘핵교’나 연필을 ‘옌필’로 발음하였으니 말 자체도 할머니의 모습 따라
주름지고 쪼그라드는 걸로 여긴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구멍가게를 하게 되고 또 라면을 열심히 팔다보니
그 옛날 외할머니의 라맹은 라면이라고 바르게 말할 때보다 발음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맹’의 모음 ‘ㅏ’와 ‘ㅐ\'는 혀의 움직임에서 높이가 같고, 높이가 같다보니 두 모음 간 혀의 이동이 쉬워
라면보다 부드럽게 발음해진다. 외할머니의 ’라맹‘은 늙고 주름진 발음이 아니라 할머니의 혀가 움직이기 쉬운 소리를 선택한 것뿐이었다. 고로 나이든 사람들의 발음이 공식적인 대우를 못 받아서 그렇지 혀의 움직임에서 매우 경제적이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라맹.....우리 가게에는 라면 4사 상품이 들어온다. 봉자는 라면 맛이 거기서 거기란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제조사에 따라 섬세한 맛이 다른지 손님의 입맛은 다양하기만 하다.
라면 손님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회사 별로 여러 가지를 들여놓아야 하는데,
오늘은 ㅅ 라면이 들어오는 날이다.
라면 점유율면에서 2위인 ㅅ사 대리점주는 40대 후반, 봉자 가게에 들어서자 말자 한숨부터 내쉰다.
“휴! 왜 이렇게 장사가 안 되죠?
(그건 봉자도 모르오.ㅡ.ㅡ;;)
“완전 바닥이에요. 가는 곳마다 반품은 쌓이고......”
“그러게. 여기도 마찬가진데요 뭐.”
유통업계 돌아가는 형편이 사실인지라 봉자도 맞장구를 친다.
“아시죠? 사장님. 저기 아파트 안 가게 문 닫은 거요. 오늘 물건 다 뺐답니다.”
(그건 아오.)
봉자네 가게와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한 곳이니 모를 리 있겠는가.
장사가 안 돼 문 닫은 곳이란 바로 상가의 신화인 주공아파트 슈퍼!
그 신화가 완전히 무너졌다.
일단 대리점 입장에서는 물건 넣을 곳 한 곳이 없어졌으니 매출에 지장이 있을 건 뻔하다.
대기업의 SSM 진출로 동네 슈퍼가 하나 둘 문을 닫는 현실도 그렇지만
서로의 어깨 곁으로 먹고산다는 공통분모 앞에 동지애를 느낀다.
더운 날 비지땀을 흘리며 한 박스라도 더 팔아보려 애써보지만
갈수록 지지부진한 라면 매출에 조롱조롱 매달린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맘이 짠하다.
냉장고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캔 꺼내 주려 일어서려는데
이 아저씨 갑자기 조용하다.
푸념도 지쳐 우는 걸까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이게 웬 일이야?
입이 점점 벌어지다 귀에 걸려 대략 2초 뒤에는 침이라도 흘릴 기세다.
봉자는 그의 눈동자가 TV 화면 속에 완전히 꽂혀있다는 걸 알았다.
TV 속에는 무슨 걸 그룹이 쭉쭉 뻗은 다리와 호리병 같은 몸을 좌우로 흔들며
유혹적인 노랠 부르고 있다.
‘허, 저건 사람도 아니고 인형도 아녀.’
천상의 팔선녀라도 만난 듯 몽롱한 자세로 TV를 보더니 갑자기 봉자에게 물었다.
“쟤네들 정~말 잘 하죠?”
“네, 뭐....쟤들이 누군데요?”
시큰둥한 봉자의 물음에 산뜻한 대답이 돌아온다.
“포미닛.”
아이구야 참.....
내 눈엔 노상 ‘갸가 갸 같은’ 아이돌 이름을 단번에 기억해 내다니
이 시대 가련하고 불쌍한 가장에서 걸 그룹 광팬으로 변신하는 내공이 놀랍다.
4분 안에 각자의 매력으로 사로잡아주겠다는 걸그룹 포미닛,
4분이 아니라 4초 안에 이 아저씨 숨넘어가게 생겼다.
들리는 소문에 걸 그룹에 대한 환호가 삼촌뻘이 적지 않다더라만
오늘 ㅅ 라면 대리점주의 근심은 포미닛이 다 걷어간 걸로 봐서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
매출이 뚝뚝 떨어져 고민하는 ㅅ라면 대리점주님,
늙은 봉자는 걸 그룹 같은 환상적인 위안은 불가 하겠고,
먹성 좋은 아들과 오랜만에 ㅅ사 ‘라맹’이나 실컷 삶아먹어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