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난한 친정 때문에 기죽어 있던 어린 새댁에게
숟가락 몽댕이 하나 사 주신적 없는 어머님은
누구네 며느리 시집올 때 시어머니 금팔찌 해왔다더라
큰며느리 시집올 때 받은게 없어 둘째 며느리 시집 올 때는
제대로 갖춰 며느리 보고 싶다
아직 장가안 든 시동생 까지 합세해서
살다하는 결혼이라고 못마땅해 하시는 친정 엄마가
그래도 시어머님 이부자리 등등 갖춰 보내주시는 것들을
시원찮게 바라 보시며 혀를 끌끌 차시며
금팔찌 못해온 며느리를 기죽이셨다.
내가 어머님께 뭘 받아야 된다는 생각은 미처 해 볼
사이도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도 사실 못했다.
시동생이 날 들으라는 듯 \" 엄마는 며느리 보면서 팔찌도
하나 못 얻었느냐\" 하는 말에 죄인인 듯 입을 꼭 닫았던
세월 아이들 돌잔치를 치르며 들어온 금붙이로 그 죄를
씻 듯 금팔찌며 돼지 목걸이며 반지며 귀걸이며
보석 다운 보석도 하나 없는 어머님이 걸려 내 것 챙길줄도
모르고 모두 해 드렸다 낡아서 가늘어진 아버님 반지도
금 두둑히 붙여 해드렸더니 어느 날 논에가서 두 분
멱살잡이 하시며 그 돼지 목걸이를 논두렁에서 잃어 버리셨다고
두 다리 뻗고 앉아 통곡 하셨다.
난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 것 금붙이 있는 것까지 모두 합해 해드렸지만 일단 내 손을
떠난 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내 마음을 부모님께 드린 걸로
족한다.
내가 어머님께 진실한 마음 열지 못했듯 어머님 역시
없는 이야기를 지어 내시기도 하고 어머님께 비싼 옷을 사드리고
친정 엄마랑 함께 가서 친정엄마는 싼 옷을 사드려도
집에 돌아 가셔서는 지들 친정 엄마는 비싼것 사주고 난 씨구려
옷 사주더라는 없는 말씀을 하셔서 함께간 남편과 실소를
하게 하시기도 했었다.
달력에 시댁에 가야할 날을 빨간 동그라미로 쳐 놓고 그날이
돌아오면 꼭 도살장 끌려가는 소 심정이 되곤 했었다.
사십두 살에 큰며느리를 보시고 살림에 손을 놓으신 어머님은
두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멀미로 초죽음이 되어 집에
도착해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일을 해야 며느리의 도리를 한다고
생각 하시는 어른이였기에 지금이야 내 차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멀미도 거의 하지 않지만 한 정거장을 옳게 가지 못했던
심한 멀미는 시댁에 가기 싫은 또 다른 이유였다.
내가 처음 남편을 따라 시댁에 인사드리러 갔던 날
하얀 양은 솥에 풀도 아니고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그것을
본 순간 속이 아파서 늘 그런걸 드시며 사는 어머님이 참 안 돼
보여서 결혼해 살면 정성듬뿍 담긴 따뜻한 죽 끓여 드리고
싶었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 마음같지 않고 어머님과 친해 지기는
참 어려워 꽤나 오랜동안 시댁이라는 곳은 참 가기 싫은 곳이
였다.남편이 스물 다섯에 해외에 나가 날 만났던 서른살
오 년 여 벌어 남편 이름으로 지어둔 이층 양옥집을 결혼식
올려주고 천만 원의 돈을 받기로 하고 시댁에 갈 때 마다 동생집에
얹쳐 산다며 술드시고 시위 하시는 시숙님께 집 등기를
이전해 드리라는 시부모님의 의견에 한 치의 망서림도 없이
그러라고 허락해 버린 참 철딱서니 없는 여물지 못한 여자 였었다.
자살 소동까지 벌여가며 지능적이셨던 아주버님께 난 애초에
제수씨 대우도 받을 수 없는 애송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