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love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사랑을 원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왜 평생 사랑을 찾아다닐까요?
쇼펜하우어는 그의 [성애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애 감정이란, 개체의 희생을 통하여 종족을 보존하려는 의지다. 종족의 과업이 개체보다 우선한다. 사랑의 망상과 환상에 빠지고 사랑에 홀림으로써 개체는 고통을 당하지만 세대는 존속된다.”
쇼펜하우어는 성애에 대한 이런 이성적인 고찰을 통하여 성애에 빠지거나 빠질 사람들에게, 망상에 빠져 개인적인 행복을 희생하고 있는 개체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말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이 자연이,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성격적으로 더 나은 2세를 낳기 위한 자연의 조작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성격 차로 인해 두 사람은 무한히 고통 받겠지만.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사랑에 빠지는 것은 종족의 보존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진화가 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의 종족 보존을 위한 노리개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것은 그의 자만심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정한 ‘겸허’는 하늘(생명)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르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운명입니다. 설사 그 운명이 고난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면 꿋꿋이 인내하며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하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니체도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정말 위대한 점은 우주의 단순한 노리개에서 벗어나 생명(사랑)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사랑의 환상에 빠짐으로써,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의 상대로 인해 숱한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우리 인간은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희생 속에서 겪는 수많은 고통을 이해하고 극복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나(에고)’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원래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전체와 하나가 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우주는 하나입니다. 우리 몸속에는 수많은 세포가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몸이 하나이듯이.
작은 물방울과 큰 물방울을 가까이 놓으면 작은 물방울은 큰 물방울에 흡수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개체도 전체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만은 특이하게도 ‘나’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가 자신의 생명과 자연(전체) 사이를 하나의 막처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이 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연과 분리된 느낌을 잘 느끼지 못하다가, 자라면서 이 막이 점점 두꺼워져 자연과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리의 느낌은 ‘나’에게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줍니다. 왜냐 하면 자연은 영원하지만 개체는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영원하지만 물방울은 유한하듯이. 물방울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물방울에게는 죽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물방울이 영원할 수 있는 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자연(생명)처럼 영원하려면 자연과 우리의 생명 사이를 막고 있는 ‘나’라는 막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이 ‘나’라는 막이 우리 자신을 전체와 분리시키고 고통을 일으키며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나’가 죽어야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사랑을 원하느냐? 우리가 사랑을 하는 동안은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은 자연과 하나 되어 어떤 분리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를 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술과 마약, 그 외 온갖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전부 다 이 ‘나’로 인한 전체와의 분리감과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를 잊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욕망으로 인한 좌절과 그로 인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개체가 전체(자연)와 하나가 되려는 본능인 것입니다. ‘나’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사랑)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나(에고)’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죽음과 같습니다. 그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입니다. ‘나’가 죽지 않고서는 ‘사랑(생명)’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 죽음, 생명>이라는 말은 동의어인 셈입니다.
결국 사랑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나(에고)’가 죽어야 합니다. 사랑에 고통이 따르는 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는데, 사랑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상대가 자라오면서 경험해온 세계, 즉 ‘나’에 끊임없이 고통을 가합니다. 때문에 ‘나’의 유지가 쉽지 않습니다.
부부나 연인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다가도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끊임없이 싸우는 것은 서로의 ‘나’의 집착 때문입니다. 그 집착을 끊지 않으면 사랑은 어렵습니다.
사랑하다 보면 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나’의 고통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나’가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가 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나’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숱한 고통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참사랑을 발견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우리가 정 반대 성격의 사람과 만나서 사랑하는 것은 이 우주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어 진정한 사랑을 발견케 하려는 치밀한 계획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원초적인 생명(사랑)의 고향, 즉 신의 세계로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신의 미소, 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고통 속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숙해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상대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 때로 냉정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